: 천안 계모 사건을 보면서
이곳의 마지막 글은 ‘결혼하고 싶은 여자’였다.
2016년의 흔적 이후로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다.
결혼을 했어도 나는 여전히 그대로 ‘나’다.
주민등록증을 발급한 지 10년도 넘었고, 한 남자의 아내이고, 한 아이의 엄마이지만 나는 여전히 ‘어른’이라는 말이 부담스럽다.
대체 어른은 뭘까.
주민등록증을 손에 쥐었을 때부터 고민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운전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어른일까?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어른’에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모르는 것들을 알고 있어야 하고, 사리 판단이 뛰어나고, 통찰력이 있고, 포용력과 인정을 가지고 있어야 어른이 되는 거라고 믿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나도 어른이 될 수 있는 거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나이만 먹으면 누구나 어른이 됐다.
학교 앞에서 알몸을 보여주던 바바리맨도, 정치적인 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모님을 계몽시켜라.”라고 말하던 선생님도, 술만 마시면 내게 온갖 쌍욕을 퍼부으며 가스 라이팅을 시전 하던 공연 쪽의 선배라는 인간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쓰레기 같은 N번방을 만든 자들도 모두 주민등록증을 가진 어른이기는 했다.
나이만 먹으면 어른이 될 수 있지만 누구나 어른이 될 수는 없다.
‘천안 계모 사건’을 보면서 온 몸에 피가 거꾸로 솟아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20개월인 아들이 14kg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23kg 이라니. 그것도 기가 막힌데 작은 가방 속에서 7시간을 견뎠다고 생각하니 뒷골이 서늘해져 왔다.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람에게도 ‘어른’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적어도 그녀가 어른이었다면 지켜줘야 할 작은 생명을 사라지게 하는 끔찍한 일을 해서는 안됐다. 적어도 그녀가 사람이었다면, 동물에게도 있다는 작은 인정이라도 있었다면, 자신의 자식들에게 보여줬던 애정을 조금이라도 그 소년에게 보여줬다면 작은 소년은 작은 가방 속에서 그렇게 쓸쓸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그 지경이 되도록 대체 그동안 뭘 한 걸까. 아이를 잘 키우겠다고 데리고 왔으면 새로운 환경에서 힘들지 않게 잘 돌봐주었어야 했다. 동물도 자신의 자식은 돌본다. 하물며 사람이고, 아비고, 어른인데. 본인의 힘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한 귀한 생명을 그리 보내서는 안 됐다.
온몸에 멍이 들고, 담뱃불로 지진 상처가 있던 소년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낸 어른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그들은 소년의 죽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학대’는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던 그 소름 끼치는 순간에 소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 때문에 친구들과 해맑게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있었을 소년이 먼 길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시리게 아프다.
대체 어른은 뭘까.
나는 어른일까.
어른답게 살고 있긴 한 걸까.
한 아이의 엄마로서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벌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래는 ‘창원 계모 사건’ 청원 링크 주소입니다.
이 사건이 허무한 판결로 끝난다면
정말 안타까울 것 같아서 주소를 함께 첨부합니다.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9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