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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Aug 22. 2019

매향리의 여름

1. 

뜨겁고도 고요한 여름이다. 잠시 놀라 멈춘 듯 한 치의 움직임도 없는 공기에는 따가운 햇살이 속속들이 내리 꽂힌다. 느긋하던 땅마저 지글지글 열기를 내뿜기 시작하는 한 여름의 대낮, 화성 드림파크 야구장을 지나 고온항까지 이어지는 고온리안길을 천천히 걸어 본다. 


하늘에서 태양이 기세 등등해지면 땅에 사는 농부들은 잠시 뒤로 물러난다. 논에도, 집 앞에도, 마을의 골목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후끈해진 공기를 등에 지고 일하는 대신 햇살이 순해질 때를 기다리며 한숨 돌릴 시간이다. 못된 성질이라도 부리듯 잔뜩 열기를 뿜는 태양이 사실은 달콤한 가을의 결실을 가져올 일꾼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생 하늘의 움직임을 읽고 산 매향리의 농부들이다. 


한층 달궈진 공기에 묵직한 적막이 흐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더 끈적하게 느껴지는 한여름의 더위가 매향리 사람들은 가끔씩 낯설다. 하늘을 찢는 전투기 소음이 사라진 게 겨우 14년이다. 누구에게는 평범하고 지루했을 이 한여름의 적막이 매향리 사람들은 아직 고맙기만 하다. 가만히 귀 기울이니 나무숲 그늘 어딘가에서 쉬고 있던 새가 포르르 날아오르며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조용해지니 별 소리가 다 들린다, 평생 못 듣던 작은 소리들을 늘그막에나 발견한 어르신의 표정은 무심한 듯 반갑다.    


봄에 심어 둔 벼들은 이제 잎이 푸르러지고 줄기가 단단해졌다. 얼른 여물라며 따가운 햇빛이 참 구석구석 쏟아진다. 그러다 응원하듯 더운 바람이라도 지날 때면 신이 난 벼들이 춤추며 일렁인다. 이리저리 고개 숙이는 방향에 따라 짙은 초록이었다가 희끗한 연두였다가 수줍은 녹색이다. 벼 잎으로 그려내는 녹색 물결만큼 농부의 마음을 흐뭇하게 할 풍경도 없다. 밭두렁에 심어 놓은 고추도 한층 길쭉해졌다. 잘 자라 싱싱한 초록이었다가 따가운 햇살을 받고는 잔뜩 빨갛게 약이 올랐다. 여름의 열기를 먹으며 달콤하게 매콤하게 익어가는 시간, 고요함 속에 바쁘게 움직이는 생명의 시간이다. 


여름이 오니 바다도 잔뜩 신이 났다. 바람이 들썩여도 땅이 들썩여도 애써 점잔 빼던 바다가 구석구석 내리쬐는 햇살에 슬슬 달구어진다. 출렁출렁 물결이 일 때마다 햇살 받은 물결은 반짝반짝 보석처럼 부서진다. 이미 뜨겁게 달궈진 모래밭을 오락가락 파도가 간질간질. 그만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바닷속 물까지 슬쩍 일렁이다. 속수무책으로 모두가 뜨거워지는 계절, 여름이다. 


모래밭을 달려 바닷물로 퐁당, 물놀이하고 싶은 이들은 이웃 마을 궁평리 해수욕장으로 간다. 매향리에서 북쪽으로 화성 방조제를 건너면 모래가 한 가득 널찍한 해변이 짠 하고 나타난다. 바닷물을 만난 아이들은 어느새 신발을 벗어 던졌다. 끝없이 밀려 오는 파도를 타고 또 타고, 어설픈 물장구에 짭짤한 바닷물은 자꾸 입안으로 돌진한다. 까르륵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를 넘는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신발만 모래밭을 지키는데, 이 바다가 모두 아이들의 것이다.   


모래밭 뒤편으로는 5,000그루의 소나무가 숲을 이룬다. 시원한 해송 숲 그늘 아래로 나들이 나온 가족은 한가롭게 캠핑을 즐긴다. 바닷바람 맞으며 맘이 느긋해진 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노리는 갈매기도 해변 주위를 맴돈다. 바다를 따라 2킬로미터 넘게 이어지는 모래밭에는 바다를 향해 세운 철조망이 남아 있다. 매향리에서는 이런 철조망 너머로만 바다를 보던 나날이 52년 동안 흘러갔다. 전투기가 날아와 철조망 너머로 포탄을 떨구면 그 바다에는 죽음만 있었다. 이제 철조망으로 가려졌던 바다가 모두의 차지가 되었다. 다행이다. 


3. 

스르륵 물이 빠져 나간 자리, 끈적한 갯벌이 얼굴을 드러낸다. 놀이터이자 쉼터였던 바다가 일터가 될 시간이다. 매향리 앞 바다의 농섬 주위까지 온갖 생명들을 품은 검은 갯벌이 열리는 시간. 갯일로 먹고 사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들고 나는 시간이 나라님 말씀보다 중요하다. 


빈 바구니를 든 아낙네가 갯벌 사이로 난 길을 타박타박 걸어간다. 평생 해 온 일이라 철 따라 낙지며 바지락이며 잘 나는 자리는 이미 훤하다. 호미가 바빠지면 들고 간 바구니는 이내 묵직하게 채워진다. 채 빠져나가지 못한 바닷물이 갯벌 중간중간 모였다가 뜨거운 햇살 때문에 금새 아지랑이로 핀다. 줄줄 흐르는 땀방울을 잔뜩 머금은 아낙의 등판에서도 아지랑이가 필 판이다. 


여기저기 바쁜 갈퀴질에 정신이 쑥 나간 갯벌이지만 그래도 놀러 온 꼬맹이에게는 온 몸에 진흙 묻혀가며 뒹구는 운동장이 되어 준다. 숨구멍 마다 숨어 있던 작은 게들도 빼꼼 얼굴을 내민다. 슬슬 밀려 들어올 물때 시간 말고는 이 갯벌에서 나가야 할 이유가 없다. 밀물이면 배를 띄우고 썰물이면 뻘에 나가 일해야 할 사람들이, 사격장 깃발에 따라 바다에 들고 나는 요상한 52년을 살았다. 아무 때나 갯벌로 총탄이 우수수 떨어지던 시절과는 천양지차,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것 같다.


4. 

해가 바다를 떠나면 아침이 되고 다시 바다가 해를 당기면 노을이 된다. 지는 태양이 애닯다 맘을 뺏기면 어느 새 푸른 빛 바다는 멀어지고 주황 빛 물결이 다가온다. 미처 놓지 못한 숱한 그리움들이 순식간에 밀려오는 순간. 궁평 해수욕장과 항구에서 바라 보는 노을 역시 화성에서 꼭 봐야 할 8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특별하다. 해가 느릿느릿 바다 아래로 떨어질 때면, 어깨를 다닥다닥 붙이고 노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하나 둘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궁평항에서 화성 방조제를 따라 매향리까지 내려 오는 길에도 내내 황금빛 석양을 볼 수가 있다. 그럼에도 매향리에 다다르면 농섬 옆으로 내려 앉는 태양이 괜스레 서글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찬란하게 깔리는 석양이 52년 동안 포탄받이였던 농섬의 아픔을 행여 묻어버릴까 쓸쓸하다. 이제 매향리 사람들은 조용히 기다린다. 이런 찬란한 고요함이 좀더 익숙해지기를. 그리고 기도한다. 하늘과 바다의 흐름만 읽고 살아도 되는 지금의 평화가 계속되기를. 그래서 일렁이는 물결 속으로 붉은 해가 꼴딱 지는 풍경이 그저 선물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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