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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Jul 22. 2019

매향리를 시로 남기다

가끔 지나는 차들 말고는 내내 조용한 마을의 적막을 깨고 찾아 오는 손님들이 있다. 평화 마을 투어를 나선 방문객들이다. 대형버스를 타고 온 단체라면 의례 있을 법한 시끌시끌함 대신 내심 진지한 눈빛이다. 포탄 껍질이 줄지어선 기념관 마당으로 들어서면 다들 순간 먹먹해진다. 오랜 세월 이 마을을 채웠던 공포의 냄새를 모두가 맡기 때문이다. 


쿠니 사격장이 있던 시절부터 자리를 잡았던 옛 교회 건물에는 매향리 사람들의 기억을 담은 전시물이 있다. 옛 시절의 사진이나 그림들 사이사이에 연필로 꾹꾹 눌러 적은 원고지도 몇 장 놓여 있다. 2005년 미 공군의 사격훈련장이 폐쇄한 이후에도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이들이 몇 편의 시로 새겨놓은 아픔들이다. 


사람이든, 사랑이든, 믿음이든, 무언가를 잃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소중했던 만큼 크게 비는 자리에서 느껴지는 당혹스러움. 만약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가정과 상상 속에서 자꾸만 커져가는 자책감. 이미 내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에 대한 깊은 원망과 무력감.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뼈 아픈 현실에 기나긴 밤은 내내 아프다. 고작 몇 개월짜리 사랑 하나 잃은 아픔에도 우수수 시어들은 쏟아진다. 


그러니, 오십 년이 넘은 세월 동안 일상을 잃었던 사람들에게서 쏟아지는 아픔은 낟알처럼 무수하다. 며칠 도로 공사를 하거나 몇 달 앞집 건물을 올리는 대형 사건이 없는 한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권리를 오십 년 동안 잃었던 사람들이 한자한자 눌러 적은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게 된다. 돌아보는 것 자체가 고통인 긴 세월이었다. 그 기억들만 주어 담아도 세상에서 가장 뼈아픈 시집이 된다. 


1.

내 것을 빼앗기고도 항의 조차 못하고 수십여 년을 살았다. 그땐 다들 몰랐으니까, 라며 위로해봐도 그 시절 무력했던 어른들이 후손들은 내내 원망스러웠다. 그땐 그런 시절이었어, 라는 어른들의 설명은 비겁한 변명처럼만 들렸다. 마을 사람들 마음 속에는 자포자기하는 무력감이 그렇게 오랜 세월 박혀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부터 마을 근처에서 주둔하던 미 공군에게 큰 소리 한번 제대로 쳐보지 못하고 마을의 땅과 바다를 고스란히 내어줘야 했다. 전쟁에서 도와 준 고마운 은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생전 보지도 못했던 최신식 무기들을 가진 강대국이라는 이름으로, 휴전선 아래에 살며 언제 깨질 지 모를 평화를 지킨다는 방위군의 이름으로, 미 공군의 폭격 훈련장이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 만들어졌다. 


이 땅을 부르는 ‘고은리’라는 어여쁜 이름이 있었지만, 우리나라 말이 낯선 이방인의 혀끝에서는 영 다른 이름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다른 나라 이름 달고 산 쿠니 사격장”이 마을의 땅과 바다를 차지해 갔다. 그리고 오십사 년 동안 이곳은 대한민국의 고은리가 아니라 미국 태평양 미 공군 사령부가 가장 아끼고 애용하는 미군 전용 폭격장이 되었다. 



“반벙어리로 산 오십사 년

어긋난 상처. 폭격소리 멎었지만

비행기 소리 귓전을 윙윙거리고(…)

온갖 손가락질에 몸서리치며

내 나라 땅이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어

쓰라린 이야기 철조망에 걸고 

빛 바랜 폭격 신호기만 혼자 울고 있다.”

*출처: 김영애, <잃어버린 섬>, 매향리 스튜디오 소장(연도미상)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마을 위로 전투기가 날았다. 시도 때도 없이 땅으로 바다로 갯벌로 총탄이 떨어졌다. 어두운 밤이면 조명탄을 쏘아 올렸고,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어 잠을 못 이루는 건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생기를 잃어가는 사람들처럼 소들도 닭들도 비실비실. 노상 풍성하게 캐 올리던 낙지도 통통하던 굴도 점점 메말라갔다. 




“어둠 속에서 조명탄이 속내를 드러내자 농섬은 치욕의 알몸으로 진저리를 쳐댔고

낙지들은 뻘 속에서 먹물 오줌을 지렸다. (…)

괭이 갈매기들이 공중에서 알을 떨어뜨렸고

아낙들은 죽은 조개처럼 침묵했다.”  

*출처: 이덕완, <매향리 쇠꽃>, 매향리 스튜디오 소장(연도미상)


2.

마을 앞바다에 떠 있는 농섬은 매향리 사람들에게는 가장 아프게 새겨진 상처다.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었다면, 그저 마을 앞바다의 작은 쉼터가 되었을 섬이다. 힘겨운 한국전쟁도 끝났으니 이제 어부들이 잠시 배를 대어 쉬었다 가고, 굴 따러 온 아낙들이 잠시 모여 수다를 떨면 그만인 장소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미 공군 전투기의 해상 표지판이 되어 수십 년 동안 집중 포화를 맞은 농섬은 매향리 사람들 모두에게 너무나도 “손끝 아린 상처”다, “생인손 앓는 난장이 농섬”이다. 




“다정스레 불러주는 이 없어도

어부들 사랑 한껏 받았던

새끼 손가락 같던 농섬

삼분의 일만 남아

포탄 박힌 가슴, 찢긴 옷자락을

폭풍우에 드러낸 채 가뿐 숨 토해낸다.”

*출처: 김영애, <잃어버린 섬>, 매향리 스튜디오 소장(연도미상)



아무 생각 없이 섬 근처 웅덩이에서 자맥질 하던 아이들은 더 이상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노인이 되어 갔다.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고 나가 노는 아이를 혼쭐내던 엄마는 차라리 그 때가 좋았다며 한숨을 쉬다 하나 둘 사라져 갔다. 태어날 때부터 폭격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에게 마을 앞 바다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잉태하는 곳이었다. 뿌연 연기와 화염의 독기가 서려 있는 곳. 푸른 바다에서 벌떡거리던 물고기도 사라졌다.  




“기억의 소리들만 무성한 빈 섬

소리의 파편들을 보았다. 

포란을 포기한 물떼새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들 

그 나머지들. 

비바람이 잦은 작은 행성에 

언제부턴가 그들은 밀려나고 없었다.” 

*출처: 김영미, <농섬>, 매향리 스튜디오 소장(연도미상)


3.

오십사 년 동안 평화로운 일상은 없었다. ‘조용한 시골 풍경’이라는 진부할 정도로 당연한 수식어가 이곳 매향리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꽃잎 위를 붕붕거리며 나는 벌들의 소리, 짝을 지어 포르르 날아오르는 잠자리의 날개 소리,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나지막이 가르릉거리는 고양이 소리. 이 모든 낮은 소리들은 들리지 않았다. 고막을 지나 심장까지 찔러대는 전투기의 소음에 묻혀 이곳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낮은 소리는 사라졌다. 




“설익은 사과 억지로 한입 문 것 같은 

한쪽 가슴에 꾸겨진 채 남아 있는

그래도 뱉어 낼 수 도 없었던 것이

참, 대단하지 않은가

폭탄 속에서 꽃이 피어있지 않든가

농섬의 폭음은 굽어진 갯골에서

조개와 망둥이가 어르고 

갈매기와 새소리로 귀 막음 하지 않든가”

*출처: 이수자, <리 매향>, 매향리 스튜디오 소장(연도미상)



멀리서 전투기가 날아오는 날이면 저 멀리 하늘부터 울렁였다. 아니, 그런 날은 거의 매일이었으니 전투기가 날아오는 시간이 되면 마을사람들의 가슴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쌩쌩 전투기가 날아오고 쿵쿵 포탄이 떨어졌다. 쾅쾅 표적에 명중시키고는 시원하다는 듯 돌아갔다가 어느 새 다시 돌아오는 전투기를 바라보는 매향리 마을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전쟁 영화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매번 놀란 가슴을 부여 잡고 마을의 작은 교회로 피해 봐도 “숨 몰아 쉬는 교회 모퉁이, 날 선 바람만 매달고” 있었다.  




“강풍이 몰려온다

근심 가득한 종탑 아래 

플라타너스 어깨를 흔든다

포탄 퍼붓는 소리에 놀라

몸을 웅크리고

정수리마저 부서지는 밤


하늘에서 조명탄 내려오면 

꽃들도 숨을 죽인다.“ 


*출처: 김영애, <종소리 울리는 날>, 매향리 스튜디오 소장(연도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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