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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Oct 29. 2019

자연이 흐르는 길, 평화를 부르는 길

매향리 둘레길 가을 스케치

1. 

걷고 싶은 선선한 가을이 찾아왔다. 바다를 스쳐 땅으로 찾아오는 바람에는 슬쩍슬쩍 찬 기운이 돌고, 아직은 기운찬 햇살을 받은 땅에서는 따뜻한 공기가 퍼져 오른다. 찬 듯 따스한 듯, 끝나가는 듯 시작하는 듯, 여름에서 불현듯 겨울로 바뀌어 가는 순간. 뜨거운 여름은 아쉬움에 돌아보며 떠나가고 찬 겨울은 들어오기를 머뭇거리는 사이에, 청명한 가을이 아주 짧게 머물다 가는 시간이다.

아차 하는 순간 지나가 버리는 이 특별한 가을을 최대한 오래 담아보기 위해 매향리 둘레길을 걷는다. 시끄러운 미 공군의 사격훈련장이 있던 마을로만 기억하는 이에게는 상전벽해가 이런 건가 싶을 만큼 평화롭고 조용한 길이다. 산의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그저 위로만 나 있는 등산로 대신 산이나 도시를 바깥으로 삥 둘러 걷는 길, 둘레길이 가진 원래의 의미와도 딱 맞는 길이다. 정복이라는 말만 들어도 전쟁이 연상될 만큼 오랜 세월 유사전시상황에 방치되어 있던 매향리 마을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무언가를 정복할 필요 없이, 하늘 위를 내내 맴돌던 전투기마냥 높이 올라갈 필요도 없이, 그저 마을 둘레를 가만히 둘러가는 길. 서두르는 사람도 없이 다그치는 사람도 없이 그저 나지막한 마을 언덕 주위를 따라 걷도록 만든 길이다.  


2. 

둘레길의 첫 번째는 바다에서 시작해 바다로 이어진다. 어부들이 고기를 잡아서 돌아오는 선착장이자 매향리에 온 손님들은 꼭 한번쯤 들르는 고온항에서 출발한 둘레길은 곧바로 농섬이 한 눈에 들어오는 바닷가로 이어진다. 매향리 둘레길의 시작인지라 사람들의 제일 큰 마음을 모아 ‘평화의 길’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바닷물이 빠져 나가는 시간이면 농섬까지 이어진 길이 자잘한 바위들이 늘어선 갯벌 사이로 드러난다. 물 따라 들어온 고기가 나갈 틈이 없게 쳐 놓은 갯벌의 그물 주위에서는 갈매기들이 기회라도 엿보듯 어슬렁거린다. 바닷물이 빠졌을 때는 해변 쪽 길로 걸으면 되고, 물이 차 오르면 얕은 언덕을 따라 마을로 이어진 길을 걸어야 한다. 

곧 다가올 겨울이면, 이 마을에서는 나름 번화가인 고온항은 굴밥을 먹으러 온 외지인들로 북적일 테다. 뚝배기에 담은 밥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득 올려줄 그 굴을 따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새벽마다 작업복에 호미와 갈고리를 챙겨 들고 집을 나선다. 굴 철이 아니라도 바지락과 맛조개, 가무락, 낙지, 칠게가 풍성히 나는 땅. 갯벌에서 나와 바구니를 끌고 가는 아주머니의 오늘 수확량은 어떤지, 자꾸만 슬쩍 넘겨 보게 된다. 빈 듯하면 오늘 하루 허탕이었을 까봐 애틋하고, 찬 듯하면 무거울 까봐 또 애틋해지는, 사람의 마음은 매 한가지다.   


3.

바닷길에서 방향을 틀어 마을 어귀로 들어서면 갯벌과는 또 다른 풍경이다. 동네로 한 걸음 들어서니 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집 마당의 개들이 지나가는 이방인에게로 느릿하게 시선을 돌린다. 동네 사람이 곧 한 가족인 작은 마을이라서 일까, 주인의 집을 지키는 개들도 이제 컹컹 짓지 않고 오가는 이를 물끄러미 쳐다 만 본다. 포근한 가을 햇살을 받고 발걸음이 한층 여유로워진 우리처럼 개들의 기분도 마냥 느긋해졌나 보다. 

늦은 오후가 되면 논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 골목을 거니는 주민들과 자주 마주친다. 담벼락 아래에 만들어 놓은 텃밭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하는 노부부는 같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손발이 척척 맞는다. 가을 문턱에서 머뭇거리는 겨울이 성큼 발을 디밀기 전에 해야 할 들이 많다. 

담장 밖으로 삐죽 고개를 내민 감나무에는 이제 감 몇 개만 대롱대롱 남아 있다. 참 색도 곱게 영근 감이지만 이건 사람 대신 새들 몫으로 남겨 놓은 것들. 오십 여 년간 마을 상공에 떠 있던 전투기 때문에 새들 역시 마음껏 날지도 울지도 못했을 텐데, 그 때 그 이야기를 지금의 새들은 전해 들어서 알고 있을까. 잘 익은 감 맛을 보러 내려 앉을 까치에게 문득 물어보고 싶어졌다.  

처마 아래에는 줄줄이 꿰어 놓은 마늘다발이 누런 가을 색으로 말라가고 있다. 고향 떠난 자식들에게 김장하라고 바리바리 챙겨 보내 줄 양념거리일 테지.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 싶은 부모의 맘이 처마 밑에 같이 주렁주렁 열렸다. 찬찬히 겨울을 준비하는 매향리 마을의 소박한 풍경이 평화로운 적막 속에 흐른다.     


4.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앉은 마을을 벗어나 너른 들판으로 향한다. 이미 가을걷이를 마친 논은 그 옛날 까까머리 중학생처럼 짧은 머리로 이발을 했다. 아직 걷어 들이지 않은 황금빛 벼 이삭은 다음 베일 차례를 기다리며 무겁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벼들이 싹둑 잘려나간 논의 옆 두렁은 이제 억새들의 세상이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은빛이나 흰색 물결을 만드는 억새는 키가 성큼 자랐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가을 하늘 아래 곱고 늘씬한 자태를 뽐내며 하늘하늘, 바람과 함께 춤추는 억새는 가을 풍경 그 자체다. 

이삭마저 탈탈 턴 논에서도 할 일이 남았던 농부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더니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이제 아늑하고 조용한 쉼터가 된 곳, 매향리 마을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멀어져 가는 농부를 향해 억새는 한껏 손을 내밀어 흔들며 작별인사를 한다. 이제 막 날아들기 시작한 가을 철새들도 자로 잰 듯 아름다운 삼각형 편대를 이루며 오늘의 쉴 곳을 찾아 떠난다. 제법 서늘해진 가을 저녁의 바람이 들판 위에 선 모든 것들을 어루만지며 지나가고 있다. 



5.

매향리 둘레길의 마지막은 짙고 붉은 노을이 함께 한다. 바지선 앞 초소에서부터 매향 AT&T 야구장까지 이르는 길, 바다 쪽을 향해 세운 철책이 걷는 내내 이어진다. 철조망 구멍 사이로 힘껏 비집고 들어오는 바닷바람이 왠지 비장하다. 걸어가다 보면 철조망 너머로 더 없이 아름답고 고즈넉한 석양이 바다로 내려 앉는데, 저물어 가는 태양 바로 옆에 농섬이 떠 있다. 

미 공군의 사격훈련장이 들어서면서부터 긴 세월 겪어야 했던 아픔은 이곳에 사는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마을 앞 바다의 섬으로 미 공군의 전투기는 매일같이 포탄과 총탄을 퍼 부었고, 농섬은 생명조차 싹틀 수 없이 반 토막이 나 버렸다. 쿠니 사격장이 폐쇄된 지 이제 14년, 이제야 조금씩 풀 씨가 자라나 언덕을 이루고 떠났던 새들이 다시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철조망 너머 바다로 조용히 가라앉는 노을을 보고 있으면 왜 이 길을 ‘희망의 길’이라 이름 붙였는지 알게 된다. 차가운 철책이 아픔이었다면 이제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그 아픔 너머의 풍경, 이 자연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가 품어야 할 희망이다. 포탄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던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의 소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자연의 소리가 이제서야 다시 들리고 있다. 기나긴 세월 사람들의 심장을 쥐어짜던 전투기 소음이 사라지고 나서야 만나게 된, 고요함 속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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