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만난 건 어느 겨울의 초입, 투명하게 내리쬐는 햇살마저도 차가운 얼음처럼 느껴지는 쌀쌀한 아침이었다.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온기라고는 하나 없이 써늘한 매향리 역사관 구석 방에서 방문객을 반기는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그게 누구이든, 그게 언제이든, 매향리 사람들이 겪어 온 일들이 궁금해서 찾아 오는 사람이라면 그저 반갑기만 한 전만규 위원장은 역사관 구석의 임시처소에서 얼른 주전자를 가져다가 따뜻한 커피를 끓여내 준다. 마을 사람들에게 미 공군의 전투기소음이 들리지 않는 집을 되찾아 준 그는 정작 20년 째 자신의 집을 잃고 살고 있다.
“원래는 미군기지 정문 앞에다가 비닐 하우스를 짓고 살았어요, 농성을 하는데 쓰려고. 거긴 정말 여름에 춥고 겨울엔 뜨겁고 했는데. 마침 미군기지에 다니는 경비원이 새벽에 불을 질렀어. 그때 (미군기지에) 자기 3형제가 다녔는데 형제들 직장을 없애라고 하는 거니까. 그래 가지고 어쩔 수 없이 이쪽으로 옮겼죠.”
1.
마을 앞 바다가 훤히 바라보이는 명당 자리에는 미 공군의 전투기들이 수시로 날아드는 사격훈련장이 있었다. 사격장을 관리 감독하는 미군들이 머무는 기지도 있었고, 그 미군들을 보좌하고 기지를 지키는 한국인 직원도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한 농부와 어부뿐이던 이 마을에서는 시골군수보다 더 좋다는 꿈의 직장이었다.
그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멈추지 않는 전투기의 소음과 아슬아슬한 죽음의 위협 속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살아야 했다. 사격훈련장이 들어서면서 어장도 잃고 농토도 잃고 점점 가난해지던 사람들. 마을 하늘 위를 끊임없이 나는 전투기의 굉음만큼이나 마을 사람들의 침묵과 체념의 시간은 길었다. 1988년 처음으로 매향리의 소음피해 문제를 걸고 투쟁에 나선 건 미군의 폭격훈련이 시작된 이후 37년 만의 일이었다.
“1988년에 처음 집회를 하고 미군기지를 점거하고 시위할 때 그 첫 집회를 바로 여기에서 한 거에요. 그땐 건물도 없었고 여기가 밭이었거든, 마침 겨울이라 곡식도 없었고. 그래서 여기서 일대 주민들이 전부 모여서 집회를 하고 미군기지에 전투기가 폭격하는 와중에 들어가서 몸으로 막았던 거죠. 굉장히 의미 있는 곳이에요. “
2.
험난한 시작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987년의 민주항쟁 이후 한국사회에도 많은 변화들이 일고 있었지만, 한낱 시골에 사는 개개인들이 모여서 미군과 정부를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할 엄혹한 시대였다. 30대 초반의 나이였던 그가 마을의 청년들을 모아서 소음 문제를 공론화 하고 외부에 알리려고 나서자 같은 마을의 어른들부터 반대하고 나섰다.
“어르신들이 보기에는 어린 애가 왜 저러나. 당시엔 사회적인 분위기가 30대면 어린애였어요. 그런 어린애가 수십 년간 쌓아 온 반공이데올로기의 견고한 껍데기를 깨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죠. 빨갱이 소리 굉장히 많이 들었죠. 다른 데도 아니고 미군을 건드리는 건, 바로 죽음, 바로 패가망신하는 거였어요.”
전세계에서도 가장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거대한 거인, 미군과 벌이는 싸움이었다. 어렸을 때 교회에서 제일 인상 깊게 들었던 거인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의 이야기가 자신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때 얻은 감동과 용기로는 정의로운 편이 이길 싸움이라 겁날 게 없었던 청년이었지만, 반공이데올로기와 궁핍한 삶에 익숙해져 버린 어른들의 반응은 달랐다. 뜻을 함께 하던 이들도 집안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면서 자꾸만 움츠리게 되고 하나 둘 사라지기도 했다. 갈 길이 멀고도 멀었다.
“여기가 집성촌이니까 집안의 숙부모님들, 아침저녁으로 다 몰려와서 난리가 났어요. 기관이나 경찰에서 나와서 저 조카 막아라 하도 난리를 치니까. 우리 어머니는 못 말리는 장남 성격을 아니까 이제 다 죽게 되나 보다, 차마 말은 못하고 울기만 하시고. 숙부모님들은 폭격 소리가 싫으면 네가 새끼들을 데리고 떠나라, 왜 집안을 빨갱이 집안을 만드냐, 그러셨지요.”
3.
참 어렵게 주민들의 뜻을 모으고 어떻게든 같이 싸워나갈 동력도 마련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소요라고 생각했던 미군도 점점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1988년에 시작한 싸움은 생각보다 훨씬 길어졌고 그 사이 구속과 연행은 밥 먹듯이 했다. 하지만 농번기가 되면 시위하다가도 논에 물 대러 가야 하고, 낮에 시위하느라 못하면 밤에라도 곡식을 거둬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천상 농사꾼들에게 땅을 건 협박은 참 치졸하고도 잔인했다.
“미군 기지 안에 할아버지 대대로 지어오던 토지가 있었어요. (시위가 없는) 오전에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미군 책임자하고 통역관 경비원 한국경찰 파출소장 면장하고 다들 와서 농사를 짓지 마라, 만약 농사를 지으려면 앞으로 폭격에 방해가 되는 시위를 하지 않는다고 약속해라, 그러면 미군한테 말을 잘 해서 농사를 짓게 해주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제안을 거절한 그의 논에는 자갈이 부어졌다. 미군들이 트럭에다 모래와 자갈을 가득 싣고 와서는 파랗게 싹이 돋은 모판에다 들이붓는 모습은 기가 막혔다. 이제 물러설 곳도 없게 된 싸움.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하고 힘을 모을 장소가 더 절실해졌다. 매향리 최초의 집회가 열렸던 장소에 마침 창고가 하나 지어져 있었다.
“비닐하우스를 짓고 임시로 하다가 96년도에 여기를 임대해서 들어온 거에요. 처음엔 주인이 세를 안 주겠다고 했어요, 매향리 투쟁사무실로 쓰겠다고 하니까. 그때 제 아내가 횟집을 했거든요. 결국엔 마을 유지되시는 분들 어르신들을 몇 차례 모셔서 대접을, 그러니까 로비를 했죠(웃음). 꼭 사무실로 써야 하니까, 어르신들이 주인한테 힘을 좀 써달라고”
벌어오는 것 하나 없는 남편 덕에 가장 역할까지 떠 맡게 된 아내는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힘들게 바다에 들어가 굴을 따다 놓으면 남편은 여기저기에 인사하느라 퍼 나르기 일쑤였다.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의 남편이 기나긴 싸움을 도와주는 고마운 분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인사 법이었다.
“투쟁이 길다 보니까 아내로서는 엄청 힘들었죠. 너무 힘드니까. 미군들이 마을 전체 주민을 핍박하는데, 나는 내 아내가 핍박을 한다고 그랬어요(웃음). 아내에게 핍박을 당하는 삶인 거죠.”
농담처럼 애써 웃어 넘기려고 하지만, 그의 말은 고통으로 자꾸만 느려졌다. 꾹꾹 속으로 눌러 담는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1988년에 싸움을 시작해 2005년 사격훈련이 멈출 때까지, 차마 말로 전할 수 없는 무수한 일들이 그의 가족에게는 일어났다. 아이가 자라는 것을 도통 볼 수가 없는 아빠였다. 내 가족이 아파도 병원 대신 투쟁본부로 달려가야 했던 무책임한 가장이었다. 밖에서는 정의를 위해 앞장 선 싸움꾼이었지만 집에서는 차마 들 낯이 없는 남편이었다. 아이 한번 제대로 못 안아 본 것이 제일 큰 한이 되어 버린 그다.
4.
“그 때 사무실 월 20만원, 그 임대료가 없어서 몇 달 밀렸어요. 그러니까 주인이 나가라 그러죠, 안 나가니까 처음에는 수도를 끊더라고요. 다음에 전기를 끊고, 다음에는 셔터 문을 채우더라고요. 그래서 창문으로 넘어다녔죠. 사방에 지출될 일만 있지 어느 한 곳 돈이 들어오는 곳은 없으니까.”
임대료를 내지 못해 창문으로 넘어 다니는 신세. 결국 손 대지 말아야 할 돈까지 손을 대고야 말았다. 다른 이들은 너무 추워서 들어 가지도 못하는 겨울바다에 아내는 만삭의 몸으로 나가 굴을 땄다. 그걸 시장에 내다 팔아서는 그날그날 농협 통장에다 저축을 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용할 분만비, 셋째 딸이 중학교를 들어가면 써야 할 학비였다.
“그걸 제가 훔쳐다가 임대료를 냈죠. 며칠 있다가 분만 준비를 하려고 통장을 보니까 돈이 없어진 거에요. 아내가 난리가 났지. 주인한테 가서 돌려달라는데, 받을 돈 받은 건데 그걸 주나. 그러니까 요 앞의 도로에서 그 만삭의 몸으로 떼굴떼굴 구르면서 죽어 버린다고…"
근처에 공장이 있어 대형 화물 트럭이 연신 다니는 큰길, 임신 8개월의 아내는 분을 참지 못하고 떼굴떼굴 온 바닥을 굴렀다. 안개가 유난히도 자욱한 날이었다. 줄 지어선 트럭들은 비키라고 빵빵거리고, 아내는 내 새끼 먹여 살릴 돈 내놓으라고 악을 쓰며 굴렀다. 그날은 참 심장에 피가 맺히는 하루였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하늘이 무너진 듯 앞이 깜깜하고 무력한 하루였다.
5.
지금은 지나온 일이라, 20여년의 싸움을 한번에 정리해서 말할 수 있다. 다행히 마지막에는 주민들이 이겨낸 싸움이라, 이제 웃으며 보람 있는 싸움이었다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암흑 같던 20여년을 하루하루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희망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없다. 그에게는 너무 힘들어서 그만 살고 싶은 적이 많았던 고통의 시간이었다. 무언가 달라지고 나아지는 게 도무지 보이지 않는 그 긴 시간 속에서 자기 가족의 밥그릇을 끝없이 내팽개쳐야 했던 20여년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향리를 방문한 손님마다 같은 이야기를 수백 번씩 반복해 가며 전한다. 처음에는손님들을 환한 미소로 맞이 하지만, 믿기지 않을 만큼 가슴 아픈 이야기를 풀어놓다 보면 담담한 목소리 속에 감춰진 상처가 비로소 드러난다. 몸 마디마디에는 그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처절하고 내밀한 아픔이 새겨져 있고, 숨 쉬는 호흡호흡마다 마을 사람들이 겪은 고통의 기억이 함께 저장되어 있다.
그저 소음피해가 없는 마을에서 살고 싶었던 뜨거운 피의 30대 청년은 어느 새 60대의 노인이 되었다. 지금의 평화로운 고요함이 계속되길 바라는, 여전히 뜨거운 열망을 가진 사람이다. 그 치 떨리는 소음 공해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며, 다시는 듣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며 살고 있는 매향리의 주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