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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Jun 24. 2019

하늘에서 떨어지는 총알을 잡아라

백발이 성성하게 내려 앉은 노인이 커다란 사진 한 장 앞에 섰다. 하, 이런. 짧은 탄식과 함께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노인의 눈시울은 어느 새 조금 붉어져 있었다. 


“이렇게 여기에서 이 사진을 보니 참, 감회가 새롭네.” 


이 말 한 마디를 겨우 내 놓더니 한참 동안 침묵이다. 마을 앞에 떠 있는 농섬으로 사람들이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담은 대형 사진. 그 사진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동자는 그 섬으로 그렇게 걸어 들어갔던 어느 시절인가로 함께 떠나고 있었다. 


“저길 걸어 다닌 거야. 농섬 앞에 보면 햇모래라고 있어요. 그 햇모래에 바지락이 무지무지하게 많아. 햇모래에 가면 물웅덩이가 이렇게 있었어요. 거기에 가면 꽃게가 얼마나 많은고 하니, 소나무를 이렇게 잘라가지고는 막 잡곤 했어. 한참 그러다 보면 추워 가지고는 농섬에 가서 달달달 떨고 있고 그랬지.”


1.

이제는 마냥 고향처럼 그리운 농섬에서의 추억이지만, 처음부터 이곳 토박이는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정착지가 마을 근처에 생겼는데, 당시 11살짜리 소년이었던 노인의 가족도 그 많은 피난민들 중 한 사람이었다. 전쟁의 화마를 피해,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이리저리 고군분투하며 옮겨 다니던 사람들. 맘 놓고 일년 농사를 지을 땅도 사라진 피난민들이 하루하루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곳은 주인 없는 바다뿐이었다. 


“53년도에 여기로 왔나 봐요. 황해도에서 피난 나와서 백령도에 있다가 인천 거쳐서 일로(여기로) 왔어요. 여기에서 자란 거지. 우리가 아마 최초 두 번째로 왔을 꺼 에요. 그때는 유년기였으니까 먹고 살기 위해 해변으로 온 거지. 호미만 들고 나가면 패류 해가지고 먹고 살수 있으니까.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고생한 거 밖에 생각이 안 나네.”


전쟁 통에 부모를 잃었다는 고아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지천으로 흔한 시절이었다. 그러니 찢어지게 가난해도 바람막이가 되어 줄 부모님과 목회에 신실한 뜻이 있는 형님이 멀쩡히 살아있는 소년은 그래도 행운아 축에 속했다.   


“그래도 그땐 사람들 인심이 좋았어. 집터를 빌려주기도 하고 방도 한 칸 내주고. 제일 처음 와 가지고는 남의 집 사랑방에 2년을 살았어, 5식구가. 또 다른 집 사랑방에도 또 1년을 살았어. 남의 사랑방에 살아본 적 있어요? 거기 살면서 바다에 다니고 그랬지.”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땅인 된 고향은 잊어버리고 새로운 터전에서 시작해야 하는 팍팍한 삶이었다. 즐겁게 산다기 보다는 어떻게든 살아내는 삶이었고, 제 발끝 하나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막막한 순간순간들이었다. 그래도 버티다 보니 하나 둘 방법들이 생겨났다. 초가삼간에서 시작한 교회가 세 번째가 되어서는 제법 번듯한 모양새도 되었다. 


“처음에는 초가삼간 거기에서 시작을 했고, 그 다음에는 흙돌담을 짓고 예배를 드렸지. 흙벽돌도 아니고 그냥 나무로 얽는다고 하지? 그래가지고 흙으로 발라. 위에는 양철을 얹고. 그때 사진을 못 찍어 놨네, 나중에 이런 때가 올 줄을 모르고. 세 번째에야 땅을 좀 달라고 해서 흙벽돌 찍어다가 교회를 지었지, 우리 형님이. 


2.

11살에 이 마을로 들어 온 소년과 함께 이 마을로 슬그머니 들어선 것도 있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폭격연습을 하다가 전쟁 이후 슬금슬금 마을 옆에 자리를 잡은 미 공군의 사격장이었다. 마을 앞 바다를 연신 오가며 폭격을 해대는 미 공군의 사격장은 위험천만한 전쟁연습장소였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소중한 일터이기도 했다. 특히 농사 지을 땅도 일자리를 구해 줄 연고도 없는 피난민에게 탄피 수집은 당장의 곤궁함을 해결해 줄 너무나도 귀한 일거리였다. 


“저기 가면 육지사격장이 있잖아요, 거기에 타깃이 네 개인가 다섯 개인가가 있어. 방매탄(방망이탄) 그거 하나만 주우면 하루 일당이 나갔어. 이게 딱 내려가면서 타깃에 딱 맞고 떨어지면서 튀어나가. 그 안에 사람들이 나가 있었던 거 알죠? 야구선수라고 그랬어. 여기서 사격하는데 그 앞에 딱 나가가지고. 사람들이 앞에 나가 있는데도 막 쏘는 거야.” 


그러니 동네 꼬마들부터 어른들까지 제일 먼저 배우는 기술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총알을 잘 피하는 방법이었다. 일년 내내 보다 보니 공군기의 사격 경로도 대충 그려지고, 어느 지점에서 총알을 제일 많이 떨굴지도 대충 알게 되었다. 당장 배고프고 힘든 이들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총탄이 사람 목숨을 빼앗는 무기가 아니라 사람 배속을 두둑하게 채워 줄 돈 뭉텅이로 보이는 시절이었다. 


“방매탄도 탁 내려오는 거 탁 튀는 게 보이면 피할 수 있어요. 치치치칙 소리가 나는데 어딘지 모르면 못하거든. 간이 작으면 못해요. 육지사격장에서는 기관 총사격을 하잖아요. 기관총 탄피, 그게 또 벌이가 굉장했어요. 탄피 주우러 많이 다녔죠. 저기 울타리가 없었어, 그러면 무조건 가서 그냥. 사격할 때 끼익~ 쏘면 비 오듯 떨어져, 막 떨어지는데 그냥 하는 거야.” 


3.

사격장에 가서 탄피를 줍는 건 하루 일과 중 제일 중요한 일과였던 10대였다. 탄피들을 주워다가 고물상에 팔면서 생계유지를 하던 20대였다. 그렇게 힘겨운 10대와 정신 없던 20대를 보내고 어느새 30대가 된 청년은 이제 새로운 전환점을 찾고 싶었다. 


물려받은 땅이 없는 떠돌이가 마을에 제대로 정착하려면 뭔가 다른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젖소를 기르는 것이었다.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대농이라고 불리는 토박이 주민에게 은근한 무시를 받으며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평범한 농사보다는 훨씬 남는 장사인 게 맞았다. 


“그때는 피난민을 무시했었어요. 바다에 다니는 사람도 사람 취급 안 했잖아. 그래서 소를 하게 된 거야. 74년도에 제일 먼저 이 마을에서 목장을 시작했죠. 그렇게 해서 전파가 된 거야. 그 때 당시 소가 450만원 갔었어요. 소 한 마리 팔면 인천에서 집 하나 샀어요. 그때 쌀 한 가마니가 3만 5천원이니까. 그럼 한 달에 수입이 500만원 정도 되더라고.”


하지만 마냥 꽃길은 아니었다.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도 사람처럼 안 보던 미 공군기가 마을에서 키우는 동물이라고 제대로 대우할 리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을 무시하며 휙휙 날아다니던 전투기는 축사 옆도 쉭쉭 날아 다녔다. 바로 옆에 사람들이 살건 말건 연신 쏘아대던 총탄 세례도 일년 내내 멈추질 않았다.


“아침 먹으면 풀 베다 먹이고 15년을 했어. 근데 소는 조용해야 해요. 젖 짤 때 음악도 틀어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박격포 이거는 풍뎅이 같은 비행기가 웅~ 하고 떠 있어 그러다가 갑자기 쏘는 거잖아. 그 소리가 너무 심한 거야. 부웅 하고 떠 있는 그게 제일 무서워,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까. 그러다 퀙 그냥 쏘는 거야. 소리에 놀란 소가 뛰어 가지고 울타리를 넘어 가고 막 뛰다가 여기저기 찢어지고." 


언제 어디에서 포탄이 쿵쿵 떨어질 지 모르는 마을에서 살아야 하는 동물들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겁 많은 소보다는 좀 나을 까 해서 다른 동물로 업종을 바꾸어 봐도, 사시사철 하늘을 날아다니는 공군기의 소음은 계속 발목을 잡았다. 


“다음에는 육계를 했는데, 처음에는 피해를 많이 봤어. 조그만 병아리를 사면 제일 처음에 우사 하나에 500마리를 넣는데, 박격포가 제일 세거든. 그러면 놀래 가지고 다 한 곳에 모여. 그럼 이걸 빨리 흩어줘야 해. 아니면 지나간 다음에도 계속 그렇게 있으면서 병아리들이 죄다 압사가 되는 거야.” 


4.

아침저녁으로 풀을 베 먹이던 소들의 겁의 질린 눈망울을 보며 살았다. 놀라서 무더기로 압사한 병아리들의 시체를 치우며 살았다. 그렇게 귀를 찢는 듯한 끔찍한 소음과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죽음의 불안 속에서 살아 온 것이 2005년까지. 마을 옆에 너무나 당당히 자리잡고 있어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미 공군의 쿠니 사격장이 폐쇄된다는 건 그에게는 통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1953년에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사격장이 폐쇄될 때까지 무려 52년의 세월이었다. 


이제는 마을 안 쪽에 예쁜 집도 한 채 지었다. 남의 집 사랑방이 아닌 우리 집, 시끄러운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 평온한 안식처다. 단칸방에 5식구가 겹쳐 자며 탄피를 주어다가 연명하던 시절은 이제 조금씩 아련한 추억이 되어간다. 더 이상 비행기가 날지 않는 매향리 마을은 65년 전 떠나 온 고향처럼 그저 고요하고 한가하다. 이제야 비로소,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의 고향, 나의 집이 되었다. 


“총소리가 안 난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야. 이제 여기 와서 집을 잘 짓고 살자 했지. 여기 와서 너무 고생했잖아. 남의 사랑방에 살았잖아. 그러니까 좋은 집을 짓고 살자 했지. 이런 데 앉아서 이런 이야기 한다는 게 나는 다 꿈만 같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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