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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May 17. 2019

매향리의 봄

1. 

매향리에 또다시 봄이 왔다. 2005년 8월 12일, 미 공군의 훈련장소였던 ‘쿠니 사격장’이 완전히 폐쇄되고 폭격소음이 사라진 후 13번째 맞이하는 봄이다. 미 공군의 전투기가 마을 앞바다와 육상훈련장에 폭격을 해 온 세월이 54년이었으니, 매향리 사람들은 이제 겨우 그 기간의 4분의 1 정도 조용한 봄을 누린 셈이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들과 함께 봄의 기운을 한껏 받아 보려고 매향리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화성 우리 꽃 식물원>을 찾았다. 식물원은 봄맞이 소풍을 나온 유치원 꼬마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리 오세요” 아이들을 이끄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따라 움직이면서도 옆자리 동무들과 재잘거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엄마 따라 줄줄이 걸어가는 새끼오리처럼, 나무 주위를 맴도는 종달새처럼, 마냥 싱그러운 새 생명이다. 


새로 돋은 연두 빛 잎사귀 틈새로 포근한 햇살이 스며드는 나무 그늘 아래에는 꽃 내음을 맡으며 옹기종기 모여 앉아 도시락을 먹는 또 다른 유치원생들이 있다. 봄 꽃이 반갑기는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겨우내 입었던 칙칙한 옷 대신 알록달록 가벼운 옷을 걸치고 나온 어른들은 곱게 핀 꽃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해 가며 정원을 산책한다. 봄 햇살을 피하러 쓰고 나온 모자의 챙을 무심히 툭 건드리고 가는 봄바람만큼이나 발걸음이 가볍다.    


식물원 뒤쪽으로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산 주위에는 꽃 향기가 진해진 배인 공기가 뭉실뭉실 머물고 있다. 그 따뜻하고 향기로운 봄만의 공기 사이를 지나는 산책로 계단 주위는 활짝 피어난 철쭉꽃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붉은 꽃잎 사이로 오가며 더 훈훈해진 바람은 곧 다가올 여름의 열기를 조금씩 담고 있다. 

2.

매향리에서 가장 먼저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곳은 화성드림파크 야구장이다. 겨우내 집 안에서 움츠리고 있느라 답답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음껏 퍼져 나가는 곳이다. 유소년 구단들이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기장을 8개나 갖추고 있는 전국 최대 규모의 유소년 야구장으로, 매향리 사격장이 폐쇄된 지 12년이 지난 2016년에 건설을 시작해 2017년에 완공되었다.


겨울철에도 야구장 시설을 이용할 수 있지만 전국 리틀야구대회를 비롯해 각종 경기들은 3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지난해에만 해도 9개의 야구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는데, 한번 대회가 시작되면 130여 개 팀들이 출전을 하기 때문에 야구장 주변은 선수와 가족들로 연일 북적거린다. 찾아간 날 역시 대회가 없는 평일이었는데도 열심히 연습경기를 하고 있는 청소년 야구팀을 만날 수 있었다. 


화성드림파크 야구장은 경기도 인근의 다른 농어촌 마을과 비슷했던 매향리의 모습을 가장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만약 이곳에 군 공항이 들어선다면 지금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이 야구장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런 대규모 시설이 들어선 이상 야구대회는 계속 이곳에서 열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수와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전투기의 시끄러운 출동 소음에 묻히는 모습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야구장 밖에 걸려 있는 수원 전투비행장 이전 반대 플래카드가 경기장을 찾는 이들에게는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3. 

이번 봄은 비가 적게 내려서 농사가 걱정이다. 다행히 매향리 마을 이곳저곳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넉넉하게 물을 채운 못자리에는 모내기를 기다리는 모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이제 막 모내기를 마친 논들도 하나둘씩 보인다. 고추 모종들은 밭으로 옮겨 심은 지 조금 지난 것 같다. 아기 같은 모종들이 가지런히 줄을 선 채로 열심히 키를 키우고 있는 고추 밭을 누런 개 한 마리가 지키고 있다. 덩치나 생김새는 건실한 파수꾼인데 따끈한 봄 햇살을 하루 종일 받아서인지 한껏 나른한 얼굴이다. 낯선 이가 카메라를 들고 다가가니 컹컹, 느릿한 간격으로 짖어댄다. 무심한 경계인지 얕은 반가움인지 모를 소리다.  


조금씩 그림자가 길어지는 늦은 오후, 마을 사이를 거닐다가 어느 집 앞에 걸어놓은 빨랫감에 눈길이 갔다. 자세히 보니 논일을 하러 가거나 갯일을 하러 갈 때 입는 작업복이다. 오가는 사람을 만나기 힘든 한적한 오후지만, 빨래만 봐도 오늘 마을 사람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잘 마르라고 뒤집어 놓은 장화와 일하기 편한 헐렁한 바지, 갯벌 물이 덜 빠진 장갑에는 매향리 마을 사람들이 매일같이 반복하는 노동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되지만 평화로운 하루였다. 


어느 한적한 봄날, 가끔 나는 새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마을 길을 걷는다. 54년 동안 심장을 찢는 듯한 소음으로 고통받던 이들이 자기 땅에서 평화로운 마음으로 일을 한 게 고작 13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가 않는 조용한 산책이었다.  


4. 


매향리의 봄 


너무나 오랜 세월을 폭음에 찢겨 살아온 이 땅 

너희의 더러운 이 전쟁 놀음을 이젠 견딜 수 없다 

아 언제나 해방이 올까 힘없는 민족 설움이 다할까 

오늘도 매향리 이 투쟁의 땅에 꽃은 피고 지는데 


향기 없다 꽃 향기는 없다 

미제 화약 냄새 코를 찌른다 

되찾으리라 매향리의 봄 되찾으리라 

매화꽃 향기 가득 퍼지는 날에 너를 안고 춤을 추리라 


향기 없다 꽃 향기는 없다 

미제 화약 냄새 코를 찌른다 

되찾으리라 매향리의 봄 되찾으리라 

매화꽃 향기 가득 퍼지는 날에 너를 안고 춤을 추리라 

매화꽃 향기 가득 퍼지는 날에 너를 안고 춤을 추리라


매향리에서 나고 자라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저항의 노래를 불렀던 가수 안치환. 그는 폭격의 고통이 사라진 자신의 고향을 꿈꾸며 <매향리의 봄>을 불렀다. 이제 그의 오랜 바람대로 마을 사람들의 힘겨운 투쟁은 끝나고 매향리의 꽃은 향기를 되찾았다. 이제 아이들은 화약 냄새와 폭격소음 없는 땅에서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그 가치를 메기기가 힘들 만큼 소중한 이 조용하고 안온한 매향리의 봄날이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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