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지나는 차 소리, 가끔 하늘을 나는 새 소리가 전부인 느긋한 한낮이다. 가끔은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지나다 불쑥 들려 인사를 전하고는 사라지는 마을 사람들이 매향리 역사관의 반가운 손님들이다. 그리고는 내내 평화로운 적막이 흐르는 주말의 오후. 크고 작은 잔돌이 깔린 역사관 마당을 자갈자갈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선다.
“다시 마을로 들어 온지 칠 년 됐어요. 먹고 살려고 십 년 떠났다가. 애들은 두고 밖에 나가서 돈벌이를 하느라 화물 운반 일을 했죠. 나이를 먹어서 딱히 어디 받아주는 곳도 없고, 소 먹이 운반하느라고 내내 트랙터 운전을 했었으니까.”
청춘을 걸고 싸워서 얻어 낸 마을의 역사관인데 이렇게 편히 앉아 있는 건 아직 어색하다. 대대로 이 마을에서 나서 살아 내려 온 토박인데 말이다.
그가 이 마을에 태어난 것이 1960년. 태어나기 전부터 마을 앞 바다는 미군들의 폭격 연습장이 되어 있었고,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에는 집 바로 옆에 미 공군의 육상 사격장이 세워졌다. 청년이 되고 나서는 마을 사람들을 내내 괴롭히던 사격장을 폐쇄하기 위해 싸우느라 청춘을 다 보냈다. 그리고 지치고 지쳐, 버리고 갔던 마을이다.
#1
떠났던 마을을 천천히 걸어본다. 마을 어귀에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쭉 들어가면 길의 끝 무렵에 옛날 목장 터가 있다. 한 때는 소들이 가득한 축사가 두 동이었다. 한 동에서는 우유를 짜는 젖소를 키우고, 또 다른 한 동에서는 갓 태어난 송아지들이 자라났다.
“여기가 사격장 철책하고 바로 옆이에요. 우사가 두 동이었는데, 하나는 허물어 버리고. 한 동은 형체만 남아 있는데, … 에휴 … 그때는 좀 됐는데, 이제는 말하기도 창피하지. 한 쪽에는 젖소 키우고, 한 쪽은 새끼 나면 따로 키워야 하거든요. 암놈은 젖소, 수놈은 육우로. 그 일을 꽤 오래 하다가 다 까먹고… 참 많이 까먹었지.”
내내 잘 웃고 유쾌한 그였는데, 그 때를 떠올릴 때면 유난히 말이 느려진다. 에휴, 말 대신 슬그머니 내 뱉는 한숨도 간간히 들린다. 한 마디 한 마디 꾹꾹 눌러가며 겨우 내 놓는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 떨치지 못한 고통이 있다.
#2
“우유를 아침 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짜는데. 다른 곳에선 하루 세 번씩 짜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우리는 그렇게 못했어요. 잘 먹이고 잘 자고 해야 그렇게 나오는 거지. (…) 처음 초산일 때는 이십에서 삼십 키로 정도 나오거든. 이후로 잘 먹이면 삼십에서 사십 키로 이상 나오죠. 그때가 피크거든. 그게 유지가 되어야 되는데, 도무지 그게 안 되는 거야.”
소들은 가만히 누워 있다가도 전투기가 씽씽 지날 때면 놀래서 벌떡벌떡 일어났다. 기총 사격을 하느라 한바탕 총알이 쏟아지고 마을 앞 바다에 쿵쿵 포탄이 떨어지면 소들도 덩달아 안절부절이었다. 사료도 먹이고 건초도 사다 먹이고 봄에서 가을이면 직접 풀도 베어다 먹였지만, 젖소에서 나오는 우유의 양은 자꾸만 툭툭 떨어졌다. 내가 키우는 방식이 잘 못 되었나 싶어 이곳 저곳 수소문 해봐도 도무지 해답을 알 수가 없었다. 남들처럼 먹여도 남들처럼 돌봐도 우리 집의 소들은 비실비실, 양동이 한 가득 우유를 뿜어야 할 소의 젖통은 자꾸만 말라갔다.
“외지에서 우유를 짜던 소를 사가지고 들어와도 여기로 오면 줄어 버려요. 30프로 이상. 이 마을 밖에서는 정상적으로 나오던 젖소라도 여기로 오기만 하면 유량이 확 줄어버리니까. 뭐 어찌할 방법이 없는 거죠.”
#3
사람처럼 십 개월을 품어야 겨우 한 마리 나오는 송아지는 목장의 답답한 살림살이를 피게 해 줄 마지막 방법이었다. 목장을 하던 80년대 후반 그때 돈으로 송아지 한 마리에 450만원. 소 한 마리씩 잡아서 자식 대학공부를 시킨다는 세간의 농이 허튼 소리는 아니었다. 송아지를 밴 젖소의 배를 만지면 내내 흐뭇해 하고, 오롯이 잘 키우라며 좋은 사료를 골라 먹이며, 목장의 주인들은 애타게 일 년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의 농장에는 기쁜 임신 소식도 잠시, 자꾸만 고약한 불운의 냄새가 났다.
“소가 유산을 하면 자기가 쏟아버리는데, 그게 안 나오면 수의사가 빼내야 하거든요. 안 그러면 냄새가 아주 심하게 나요. 그래서 수의사들이 알아, 뱃속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은) 송아지가 속 안에서 썩고 있으니까. 사람하고 똑같아요. 그렇게 품고 있다가 유산을 하면 손해가 아주 크죠. “
아이들은 자꾸만 커 가고 자식교육 시킬 일은 아직 아득한데 도무지 목장 사업이 커지질 않았다. 빨리 늘려 보려고 더 비싸게 주고 새끼를 밴 젖소도 사 보았다. 하지만 멀쩡하게 골라 온 소도 이 마을에만 있으면 유산이 되어 버리니, 비싸게 사와서는 되레 손해만 보는 허탕이었다. 일 년에 겨우 한 번 임신하는 송아지를 잃고 나면, 다시 별 소득 없이 사료만 먹는 일 년이 다시 시작이었다. 한 해 한 해 갈수록 살림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계속 줄어드는 한 해가 반복되었다.
“거짓말 같죠? 처음에는 저기(놀라곤) 했는데. 하도 많으니까 그려니 했어요. 그 정도로 유산이 많았어요. 심지어는 (송아지) 쌍둥이를 쏟은 적이 있거든. 하도 안 믿어서 케이비에스에 전화를 해서는, 직접 와 봐라 이게 거짓말인지, 그랬어요. 이 마을에는 너무 자주 일어나니까. 이 마을에는 일년에 십여 마리가 유산을 했죠. “
#4
살아서 나오지를 못하는 송아지들. 사격장 철책 바로 옆에 자리 잡은 목장은 언제나 우울했다. 육상 사격장에서 미 공군 전투기들이 맞춰야 하는 표적판 바로 옆에서 살아야 하는 소들도 우울했다. 태어날 때부터 내내 들었던 전투기 소음이라 이제 익숙해 진 줄만 알았다. 이렇게 사람도 견디고 사는데, 한낱 동물이 뭐 어떠랴 생각을 했다. 한 번 오고 나면 다시는 놀러 오질 않던 친구들이 쏟아내던 불평이 한 때의 농담거리가 될 줄만 알았는데, 내 전 재산을 건 사업까지 뒤흔드는 이유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어렸을 때 친구들이 여름이나 겨울방학 때 놀러 오잖아요. 한 번은 비가 많이 와서 다른 마을에 사는 친구들이 자기 집에 못 가고 우리 집에서 잤는데. 그날 하필 팀스피리트 훈련을 했잖아. 밤새 잠을 못 자고 눈이 뻘개 가지고 다시는 안 와. 나는 익숙해져서 잤는데. 한번 와본 손님들은 다시는 (여기에) 놀러 안 오죠.”
야간훈련을 할 때면 24시간 전투기가 날아 다녔다. TV 뉴스에서나 보던 훈련 광경이 펼쳐지는 사격장 바로 옆의 축사에서 소들이 먹고 잤다. 그러니 그 소들이 온전히 살을 찌울 수도, 포근하게 새끼를 품을 수도, 제대로 우유를 내놓을 수도 없었다. 군 생활을 하던 부대보다도 소음이 심하던 고향 마을, 군대에서는 편히 자다가도 휴가로 고향에만 오면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던 기억. 목장을 시작하기 전에 그 기억을 떠올렸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뿐이다.
#5
어느새 환갑을 앞둔 나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 온 남자가 사라진 목장을 바라 본다. 사람이 태어나서 60년 만에 맞이하는 생일이 환갑이라는데, 내가 태어난 간지(干支)의 해가 다시 돌아왔음을 기념하는 날이 환갑이라는데. 전투기가 씩씩거리며 날아다니던 태어난 그 해와 지금은 사뭇 다르다. 송아지가 죽어 나가는 일이 더 이상 이 마을의 흔한 소식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도무지 살아서 나오는 게 없어서, 반복되는 죽음에 지쳐서 떠난 마을이었다. 온통 마을을 감싸던 폭격기의 소음과 진동은 이 마을에서 생명을 키워보려던 남자의 꿈을 사라지게 했다. 그 끔찍한 소음을 없애 보려다가 청춘은 다 갔다. 먹고 살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다 다시 돌아온 마을은 아직 제자리가 아닌 듯 어색하다.
조용하다, 평화롭다, 적막하다. 여느 시골에서는 당연할 이 세 단어를 이 마을에 쓰기까지, 그의 인생의 육십갑자를 한 바퀴 다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