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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Oct 10. 2019

[화성호 사람] 공생염전 소금 장인 이순용씨

46년 오로지 소금, 소금밭의 장인

바다는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먹거리가 되고, 쌀과 옷이 되고, 아이들의 책가방이 된다. 남양만에 넓게 펼쳐진 갯벌은 바다만 나가면 아무 걱정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풍요로움의 원천이었다. 바다가 인간에게 선사하는 가장 큰 혜택 중의 하나가 바로 염전이다. 바닷물과 햇빛, 그리고 성실한 노동력만 있으면 소금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그 소금으로 살아간다. 화성에서 소금 생산은 어업과 함께 주민들의 주요 생업이었다. 화성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소금은 서울 마포 등지로 팔려나갔으며, 경기도 소금의 대명사로 불렸다. 경기도의 천일염전은 모두 해방 이후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남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의 생계 보조 차원에서 천일염전 개발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는데, 화성시 서신면 매화리의 공생염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실향민들이 

‘공생’ 하자 만든 염전


공생염전은 6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경기도의 대표적인 염전 단지다. 전쟁 당시 화성시로 피난 온 황해도 주민들이 이곳에 ‘공생’하며 지냈다고 해 ‘공생염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생염전’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공생’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뜻이 맞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고된 노동의 상징처럼 보이는 염전이 이렇게 이상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니, 염전 노동자의 착취사례가 종종 언론에 보도되곤 하는데 말이다. 이러한 궁금증 때문에 이순용(66세) 염부를 만났을 때, 처음 했던 질문이 공생염전이라는 이름의 유래였다. 역시 새로운 곳에서 삶의 터전을 새로 일구어야 했던 실향민들의 다짐 같은 역사가 담겨 있는 이름이었다.

“공생염전은 피난민들이 1953년부터 1957년까지 3년 동안 지게로 흙을 지어다 제방을 쌓아 만든 염전입니다. 전쟁 후 피난민들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 살아갈 때였는데, 우리도 밀가루 강냉이 가루 이런 원조품을 받아서 힘들게 살면서 만들었죠. 옛날에는 토판염이라고 흙바닥에서 하는 거였어요. 지금은 저렇게 수레로 소금을 나르고 하지만, 옛날에는 소금을 광주리에 담아서 어깨에다 지고 그렇게 소금을 날랐죠…. 삐걱삐걱하면서….”

모든 것을 두고 온 고향을 지척에 두고 돌아가지 못하는 아픔과 배고프고 고단했을 염전 개척 과정을 상상해보면 ‘공생’은 ‘함께 살아보자’ 보다는 ‘함께 살아내 보자’라는 간절함으로 다가온다.     


가장의 책임감으로 시작된 

염부의 삶     


이순용 염부는 1972년부터 46년 동안 염부의 길을 걸어왔다. 본래 아버지가 운영하던 염전인데 장남으로서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책임감이 고된 염부의 길을 받아들이게 했다. 

“흙바닥에서 타일을 깔고 하는 것만 바뀌었지 바닷물을 햇빛에 말리고 소금을 밀고하는 건 옛날과 똑같아요. 항상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하니 일기예보가 잘 맞으면 좋은데, 이렇게 금을 걷었다가 비가 오면 다 녹잖아요. 비가 오면 이게 다 맹물이 돼서 바다로 가잖아요. 그러면 다시 소금물을 만들려면 또 한 달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까 농부들은 비가 오면 바깥에서 일을 못 하니까 집으로 가는데 염부들은 반대입니다. 비가 오면 염전으로 나와서 물관리를 해야 해요. 암만 천둥 번개가 쳐도 염전 물관리 때문에 자다가도 일어나서 염전으로 나오는 게 염부의 일생입니다.”

해방 이후 경기도 일대에 조성되기 시작한 천일염전은 1980년대에 가장 호황을 누렸다. 그 때는 아침마다 염전으로 가는 길에 백여 명의 사람들로 북적거릴 정도였다고 한다. 흙바닥에서 소금을 채취하는 토판염을 하던 시절이라 질이 좋은 갯벌(뻘)을 가진 공생염전에의 소금은 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공생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색깔도 좋고, 먹고 나면 뒷맛이 달달 한 게 특징이다. 옛날부터 최고로 치는 소금이 공생염전 소금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염부의 얼굴에는 소금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좋은 갯벌에서

질 좋은 소금 나와     


“1980~90년대는 염전이 잘되었습니다. 집집이 (염부가) 두 세 명씩 다 있었으니까. 아침에 염전길에 한 백여 명 정도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시끌벅적했죠. 토판염 할 적에는 유명했습니다. 청가마에 새끼줄을 청띠, 홍띠 이런 물감을 들여서 토판염 소금이라고 팔았어요. 토질이 좋아서 소금이 맛도 있고, 영양가가 좋다고, 미네랄도 엄청 많고 옛날부터 알아주는 소금이었죠. 옛날부터 여기 소금을 찾던 사람들은 지금도 택배로 많이 찾고 있습니다.”

2016년 이후 화성에 남아있는 천일염전은 공생 대양염전(서신면 매화리40만평), 남창염전(서신면 송교리, 7만평)이다. 하지만 현재 대양염전과 남창염전의 일부는 소금 생산을 멈춘 상태로 방치되어 있어, 실질적으로 소금을 생산하고 있는 염전은 공생염전이 유일하다. 대부분의 염전이 편리한 장판염으로 소금을 생산하고 있는 상황에서 갯벌 위에 옹기 타일을 깔아 소금을 생산하는 ‘옹기판염’을 유지하고 있는 흔치 않은 염전이기도 하다.

“전라도 같은 경우에는 장판염을 하죠. 여기(염전바닥)에 까만 장판을 깔아서 소금을 생산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보시다시피 타일로 해요. 이게 타일 전에는 옹기, 항아리 깨진 거로 했는데 타일만큼 이가 딱딱 안 맞잖아요. 흙이 자꾸 나오고 흙물이 나오니까 그것도 걷어내고, 다시 이렇게 타일을 제작해서 바닥에 깔아서 소금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유일

염전 유지에 자부심     


공생염전은 화성시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염전이다. 사실 화성에 염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염전에서 일할 사람은 갈수록 줄고, 소금값도 제값을 받지 못한 게 오래다. 하지만 그는 염전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경기도에 남은 유일한 염전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 염부의 마음은 46년 동안 그랬듯이 오로지 소금뿐이다.     


힘 닿을 때까지

소금을 짓고 싶은 장인의 마음     


공생염전에는 염전체험을 하기 위해 체험객들이 많이 온다. 유치원생, 초등학생, 성인들까지 구분 없이 소금 체험을 즐거워한다. 소금밭에서 소대패로 소금을 밀고 당기고 소금 수레에 실어 나르는 일을 신기하고 재미있어한다. 소금체험이 체험 관광 중 선호도 1위란다. 이순용씨가 공생염전을 어렵게 유지하면서도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게 바로 이 순간이라고 한다. 

“힘이 닿는 한 해보려고 그러는데,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장담을 못 하겠네. 고정 고객들이 많으니까. 소금 판로에 대해서는 걱정을 안 하니까. 쉬엄쉬엄 그냥 쉬어가면서 합니다. 그냥 욕심 안 부리고.”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공생염전은 말 그대로 세상의 소금 같은 곳이다. 힘닿을 때까지 좋은 소금을 짓고 싶은 장인의 마음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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