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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성평화지킴이 Oct 10. 2019

[화성호 사람] 매향리 평화마을 건립추진위원회 전만규

쿠니사격장 십일대째 토박이 청년 전만규위원장

종잡을 수 없는 유탄, 

귀머거리 만드는 폭음 무릅쓴 채 

고향에 남아 산다는 것이 바보짓이라고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없는 자 고향 뜨기가 

있는 자 이민 가기만큼 쉬운 일인가. 

화성군 쿠니사격장 십일 대째 토박이 전만규

그리하여 그는 고향을 버리는 대신 되찾는 일에 뛰어들었다. …(후략) / 시: 최두석(시인)


최두석 시인의 시 ‘전만규’는 짧은 글 속에 매향리 마을이 겪어낸 비극과 매향리 마을 사람들의 슬픈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매향마을 대표 주민 전만규 위원장(64세)의 인생은 그대로 매향리 마을의 역사다. 그의 이름 석 자가 시가 된 이유다. 

매향리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에 있는 평범한 바닷가 마을이다. 매향리의 옛 이름은 고온리. 예부터 살기 좋고 따뜻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매향리 서해안 바닷가 농섬은 조수간만의 차로 바닷길로 열리는 곳으로 갯벌에서는 저서생물(물 밑바닥에 사는 생물)이 풍부했고 어부들은 때때로 만선의 기쁨을 누리던 바다였다. 

이곳에 사격 연습이 시작된 것은 6.25 전쟁이 한창이 1951년이다. 이듬해 한·미행정협정에 따라 이른바 ‘쿠니사격장’이 생긴 이래 2001년 6월까지 무려 50년간 주한미군의 공군 폭격 훈련장이 되었다.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 있겠는가.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하루에 12시간씩 600회가 넘게 사격훈련을 했다는 사실을. 사격장이 건립된 이후 피해를 본 주민만 713가구 4천여 명에 달한다. 오폭 사고와 불발탄 폭발로 인해 사망자만 12명, 손목 절단 및 옆구리 부상 등 오폭으로 인해 중상·부상을 당한 주민만도 15명을 넘는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나날이었다.


‘폭격의 증거’를 

‘역사의 교훈’으로 기록 


마을청년위원장 전만규는 고향을 버리는 대신 되찾기 위해 뛰어들었다. 1988년부터 유인물을 작성해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국방부, 경기도, 청와대 등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2001년 4월에는 마을주민 14명이 미군 사격장의 폭격 소음으로 피해를 보았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승소함으로써 20여 년간 진행된 사격장 철폐 운동에 전기를 마련했다. 매향리가 미군의 사격장에서 벗어난 것은 2005년 매향리 사격장 관리가 한국의 국방부로 이관된 이후다.

매향리평화역사관은 전만규 위원장이 매향리에 폭격이 멈추고 평화가 오기까지 청춘을 바치며 마을주민과 함께 투쟁했던 시절의 모든 기록을 모아둔 곳이다. 기록물 전시의 시작에는 ‘매향리 평화마을 기록전시-청년 전만규’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이곳에 전시된 기록물들은 전문가들도 놀랄 정도로 오랜시간 꼼꼼하게 모은 방대한 자료들이다. 

“매향리 역사관에는 1988년 6월 주민들에게 배포 한 최초의 유인물부터 전시되어있습니다. 그동안 투쟁을 하면서 축적해온 자료를 보면 전문가들이 놀라요. 이 투쟁이 주민들의 생존권을 넘어 역사적인 투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사소한 메모지 하나도 버리지 않았어요. 폭격장이 폐쇄된 후에는 이런 자료들이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모아둔 것입니다. 여기 있는 것은 극히 일부입니다. 투쟁하면서 의식이 변화되었고 자연스럽게 이러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축적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시위, 수배와 검거 등이 반복되던 시절에도 끈질기게 자료를 모으고 숨겨두었던 것은 폭격장이 폐쇄된 이후에 그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목숨 같은 자료’라고 이야기할 만큼 그 자료들에는 매향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전만규’라는 개인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폭격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만든 삶의 지혜

낙하산으로 만든 이불, 베개 천, 속옷          


전만규 위원장이 오랜 시간 동안 수집해온 기록과 자료 중에는 폭격의 위험 속에 아슬아슬하게 살아야 했던 매향리 주민들의 지혜로 만들어낸 물건들이 있다. 낙하산을 이용해 생필품을 만들어내는 식이다. 

“미군이 야간폭격을 하려고 조명탄을 떨어뜨려요. 조명탄의 탄피는 분리되어서 떨어지고 조명탄이 다 타고나면 낙하산이 내려오죠. 그게 갯벌이나 마을에 떨어지면 마을주민들이 주워다가 썼어요. 어머님들이 그걸로 이불, 베개 천으로 쓰고 물감을 들여서 속옷을 만들기도 했어요. 당시 쓰던 광목천은 거칠고 세탁하기도 불편했고, 나일론이 귀했으니까 나일론으로 된 낙하산을 재활용 한 거죠.”

탄피는 펴서 떡시루나 바케스 등을 만들어서 쓰기도 했다. 터지지 않은 포탄들을 주워 뇌관을 빼서 화약을 제거한 다음 종을 만들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불이 자주 나던 시절에는 불이 나면 마을에 종을 울려 함께 불을 꺼야 했기에 마을의 필수품이다. 모두 매향리에서만 볼 수 있는 ‘웃픈’ 생필품이다.           

“이제는 갯벌을 살려야지요“          

전 위원장은 매향리에 폭격이 멈춘 후 2007년부터 매향리 갯벌에 박혀있던 포탄 잔해를 수거해 모으기 시작했다. “미군이 갯벌에 포탄을 제거하고 가야 하는데 그냥 철수해버렸죠. 한국정부라도 해야 하는데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주민들이 불발탄을 트럭에 싣고 가서 국방부 미군 부대 앞에서 시위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1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아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수거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갯벌에 박혀있는 포탄 잔해가 부식되어 갯벌이 중금속 오염이 심각했고 주변 바다로 오염이 퍼져나가는 상황이었거든요.”

갯벌에서 수거해 온 포탄은 매향리 역사관 주변에 어느덧 가득 쌓였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처음엔 눈앞의 포탄 더미에 놀라지만 그 자체가 매향리 폭격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적 기록물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포탄 잔해들은 2020년에 완공되는 매향리 평화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전시물로서 규격을 갖추게 된다. 포탄 잔해를 깨끗하게 제거한 덕에 매향리 앞 농섬은 다양한 수서생물의 서식지이자 희귀 철새가 찾아드는 생명의 섬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내가 해온 일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포탄을 수거하여 갯벌의 환경을 정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 세계 미군 주둔지 중에 주민들의 요구로 기지가 폐쇄된 곳은 매향리가 최초이고 폭격으로 파괴된 자연이 생태적인 방식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곳도 매향리가 유일해서 해외에서도 관심이 많아요.”          


매향리에 

매화꽃이 만발할 때까지      


세월이 흘러 ‘청년 전만규’에서 어느덧 ‘장년 전만규’가 되었으니 심신이 고단할 만도 한데 그는 요즘 매향리를 살리는 또 다른 일에 빠져들었다. 매화나무를 가꾸기 시작한 것이다. 화성시가 내년까지 매향리 일원에 평화생태공원을 조성하기로 한 후 건립기원 매화나무 식목행사로 5천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전만규 위원장이 나섰으니 몇 년 후 봄엔 매향리 가득 매화꽃이 만발할 것이다. 매화꽃이 만발한 매향리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는 전 위원장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요즘 과거의 폭격소음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고즈넉한 음악으로 가득한 마을을 만들고 싶은 바람으로 색소폰 연습에 한창이다. 다시 ‘청년 전만규’가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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