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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수첩 Feb 01. 2016

박영석 대장을 발끈하게 한 말

박영석 대장에게 배운 진정한 리더십

박영석 대장. 대장이라는 호칭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는 안나푸르나와 칸첸중가를 비롯한 세계 8000m급 14좌와 킬리만자로 등 7대륙의 최고봉에 올랐다. 그리고 남극점, 북극점, 에베레스트의 세계 3극점 등반까지 모두 성공했다. 세상은 그를 인류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캡틴'이라고 부른다.

캡틴, 박영석

▲  박영석 대장의 리더십을 배운 <남겨진 미래, 남극> 촬영


지난 2010년 겨울 <SBS 스페셜> '남겨진 미래, 남극' 편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태양과 바람 에너지로 만든 친환경 연료만으로 남극점까지 도달하는 박영석 대장과 남극 원정대. 탐험에 있어서 최고의 전문가지만, 남극은 인간에게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화석 연료 대신 에너지를 얻어야 하는 태양은 며칠 동안 자취를 감췄고, 크레바스와 화이트아웃 등 원정대를 노리는 위험 요소도 많았다. 남극 원정은 그만큼 위험했고, 날씨와 주변 환경도 시시각각 변했다.

겨울 내내, 남극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국내에서 훈련을 했다. 영하 40도가 넘는 냉동 창고에서 생존 훈련을 하고, 남극점까지 대원들의 다리가 되어줄 에코 모빌의 상태를 매일 점검했다. 박영석 대장과 대원들, 제작진까지 모두 강원도에서 합숙 훈련을 할 때였다.

"에코모빌 엔진이 약해서, 남극에선 위험한데..."
"음식을 더 가져가야 해. 이 상태론 안 돼."
"기온 때문에 통신 장비랑 배터리 충전이 잘 될까..."


통신, 식량, 장비를 담당한 대원들은 남극의 낮은 기온과 위험한 지형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국내에서 아무리 테스트를 거치고 적응 훈련을 했다 하더라도, 막상 남극에서 제 역할을 못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쉴 새 없이 이야기 하는데, 막상 박영석 대장은 별말이 없었다. 이불을 덮고 구석에 가만히 누워 있다. 대장이라는 호칭 때문에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것일까. 

"우리 다 같이 힘을 모아서, 남극을 정복해 봅시다! 파이팅!"

처음 원정대에 합류한 한 대원이 열심히 해보자는 의미로 파이팅을 외쳤다. 그는 첫 원정에 대한 기대와 의욕이 넘쳤다. 주변의 제작진들과 새로운 대원들은 박수를 치며 파이팅을 외쳤지만, 박영석 대장과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대원들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정복? 뭘 정복해?"

박영석 대장이다. 항상 장난기 가득한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난 그는 함께 원정을 떠날 대원들과 제작진들을 찬찬히 바라본다.

"우리가 뭔데 남극을 정복해? 한 번만 더 정복이니 뭐니 했다간 봐라."
"잘 들어! 안 되는 거 이야기하지 마!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  멋진 리더십을 가르쳐준 박영석 대장.


역시 대장이다. 2박 3일 동안 대원들과 제작진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고민했던 부분을 단 한 마디로 정리했다. 그는 자연을 정복한다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자연이 잠시 길을 내주어 인간이 다니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의 오래된 철학이었고, 자연에게 배운 확고한 신념이기도 했다.

남극으로 떠난 박영석 대장과 원정대. 남극은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잔혹했다. 가장 중요한 태양을 며칠 동안 가리고 있는 구름 때문에 에너지를 모을 수가 없었다. 울퉁불퉁한 사스투르기(요철지대)를 지나면서 태양열 판이 깨지기도 했고, 곳곳의 크레바스는 대원들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물론 가장 힘든 것은 재채기조차 얼려 버리는 극한의 추위다.

원정대의 큰 위기는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25년 만에 폭설이 내리고, 태양은 나흘 내내 구름 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설상가상으로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리는 화이트아웃에 대원 한 명이 실종됐다. 원정대를 나누면 텐트를 지키는 대원도 위험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웠지만, 박영석 대장은 대원을 찾기 위해 화이트아웃을 뚫고 길을 나섰다. 구조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기상 때문에 비행이 위험했고, 실종된 대원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색에 어려움이 많았다.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실종 12시간 뒤. 박영석 대장은 실종된 대원을 찾아서 텐트로 복귀했다. 평소 같았으면 엄청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박영석 대장은 그 순간을 남극 원정 동안 가장 위험했던 사건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대원이 무사히 살아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다. 그에겐 아끼는 동료들을 눈물로 산에 묻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실종된 사람은 바로 '남극을 정복하자'던 신입 대원이었다.

하얀 정글, 남극에서 벌인 41일간의 사투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극한의 추위 속에 장비는 제 역할을 못했고, 대원들은 텐트 칠 시간도 아까워 눈 위에서 쪽잠을 청해야 했다. 박영석은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최고의 리더이자 진정한 대장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주변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았고, 자신의 실수를 겸허히 인정할 줄도 알았다. 대학 교수직과 선거 출마 제안에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며 단번에 거절했다.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한 동료들을 포기하거나 뒤로 숨는 일이 없었다.

진짜 리더, 산악인 박영석 대장

<SBS스페셜> '남겨진 미래, 남극' 편을 끝으로 나는 <남자의 자격>으로 프로그램을 옮겼다. 2011년 가을, KBS 로비에서 방송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박영석 대장을 우연히 만났다. "어이, 친구!"하면서 먼저 악수를 건네는 손은 왜 그리 따뜻한지.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이번 안나푸르나 등정만 끝나면 남극 팀 모아 밥 한 번 먹자며 웃어 보인다. 

특유의 검정 모자와 연한 색 청바지, 두꺼운 검정 패딩까지 그대로였다. 그리고 얼마 뒤 들려온 박영석 대장의 실종 소식. 우리는 박영석 대장과 대원들이 무사히 베이스캠프로 돌아올 것을 의심조차하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안 좋다. 눈과 안개를 동반한 낙석으로 운행 중단한다."

▲ 추모패 안나푸르나베이스캠프에 있는 박영석 추모패


박영석 대장이 베이스캠프에 전한 마지막 무전이었다. 지난 2011년 10월 18일, 히말라야 안나푸르나(8091m) 남벽의 새 루트를 개척하려던 박영석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의 실종은 결국 죽음으로 끝났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들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상태다. 산을 오르면서 대원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그는 결국 그렇게 동료들 곁으로 갔다.

산악인들의 실종과 죽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 "여기는 정상, 더 오를 데가 없다"를 외친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등정한 고상돈, 산과 결혼했다며 환하게 웃었던 고미영을 비롯해 수많은 산악인이 산에 묻혔다. 

산악인들에게는 후원이 필요하다. 고산 등반에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8000m 고봉은 입산료만 1인당 1000만 원 가까이 필요하다. 대원들을 꾸려 갈 경우 개인적으론 마련하기 힘든 액수라 기업 후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기업의 전폭적 후원을 받는 원정대는 성공에 대한 압박감을 심하게 받는다. 기상 상태와 현지 상황이 좋지 않은데도 무리하게 등반을 하게 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더불어 국내 아웃도어용품 시장 규모는 해마다 점점 커지고 있다. 당연히 후원 기업들은 시장에서 경쟁 관계를 형성한다. 기업의 지원을 받는 산악인들도 덩달아 경쟁 선상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리한 경쟁은 때로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다. 2009년, 고미영(낭가파르바트 등정 중 실족사)과 오은선이 14좌 완등 경쟁을 벌인 것이 대표적이다. 

그래도 결국 산을 선택한 것은 그들의 의지다. 박영석 대장의 죽음을 놓고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아웃도어 업체들과 방송사의 유명 산악인 취재 경쟁이 불러온 참사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아웃도어와 방송사의 경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 박영석을 너무 작게 보는 것이다.

'남겨진 미래, 남극' 본편을 방송하기 전 시사회가 있던 날. 나는 행사를 기다리며 박영석 대장과 단둘이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을 슬쩍 던졌다.

"대장님. 탐험으로 모든 걸 다 이뤘는데, 왜 또 위험하게 산을 오르세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딱밤'이었다. 박영석 대장을 시사회장으로 모신다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모자를 고쳐 쓰고 일어나면서 툭 한마디를 던지고 무대로 향했다.

"야! 산을 올라야 박영석이지. 아니면 박씨 아저씨지."

누군가는 '산(山)'이 그를 불렀다고 했다.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당신의 의지대로 계획했고, 오롯이 당신의 계획대로 올랐을 것이다. 박영석 대장, 신동민 대원, 강기석 대원. 잊지 말자.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들의 심장은 얼지 않고 계속 뛰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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