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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수첩 Jan 20. 2016

봅슬레이 국가대표 원윤종,
​도전은 계속 된다

비인기 종목의 설움 극복한 '간절함' 

사회는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지긋지긋한 군 생활과 취업 준비만 끝나면 탄탄대로일 것 같았던 현실은 막막했다. 사회는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고 말 그대로 증명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2008년 가을,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운 좋게도 방송국에 취업했다. 케이블 방송이었지만, 보도와 자체 제작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는 꽤 큰 규모였다. 자료조사, 출연자 섭외부터 큐시트 만드는 것까지 하나하나 눈치로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종료 버튼을 눌렀겠지만, 혹시 출연자나 방송 관련 문의일 수도 있어서 전화를 받았다. 

"형, 저 윤종인데요. 잘 지내죠?"

군대 후임이었던 원윤종이다. 우리는 강원도 인제의 12사단 수색대대 출신이다. 대한민국 지형의 특징인 '동고서저'의 동쪽 꼭대기에 자리 잡은 곳이다. 수색대대의 임무는 밤낮으로 DMZ(비무장 지대)에서 수색, 매복 작전과 경계 작전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DMZ 작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축구다. 체육교육과 출신인 원윤종은 뛰어난 체력과 운동 실력으로 소대를 항상 우승으로 이끌었다. 

같은 소대의 사람들이 형이자 동생이고, 가족이었던 그 시절. 작은 것 하나에도 크게 웃고, 한 명의 고민이 모두의 걱정이 되었던 공간에서 유난히 까불었던 나는 방송작가가 되었고, 윤종이는 봅슬레이 국가대표가 되었다.
          

▲  국가대표 봅슬레이팀의 파일럿 원윤종 선수


2013년 봄, 그가 사무실까지 직접 찾아왔다. 당시 아메리카컵 대회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봅슬레이 2인승 금메달을 차지했다. 인터뷰와 방송 촬영으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을 텐데 얼굴 보러 잠깐 들렀다는 말이 얼마나 고마운지. 덩치는 훨씬 더 커졌지만, 사람 좋은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국제대회 포인트를 더 쌓아서 소치올림픽에 도전하려고요."

대부분 봅슬레이하면 자메이카 대표팀을 먼저 떠올린다. 영화 <쿨러닝>의 감동적인 이야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관심을 받고 있다. 해설자도 자메이카 선수들은 '경기장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올림픽에 출전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메이카 선수들과 우리나라 선수들의 차이가 뭘까. 우리에게도 봅슬레이 경기장이 없고, 제대로 된 장비가 없으며 관심과 지원이 부족한 것은 똑같지 않나.

원윤종은 국제대회에서 몇 차례 더 우승을 차지하고, 드디어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소치올림픽 출정식에서 김연아, 모태범 등과 함께 당당하게 올림픽 휘장을 받는다. 아직 소치에 가서 경기를 한 것도 아닌데, 먹먹함이 밀려왔다.

"윤종아, 고생 많았다."
"형, 끝까지 한 번 달려볼게요."
 

결국, 난 윤종이의 봅슬레이 경기를 보지 못했다

봅슬레이 국가대표 파일럿 원윤종과 서영우는 2인승 경기에서 네 차례 레이스 합계 3분 49초 27을 기록, 18위를 차지했다. 역대 대한민국 봅슬레이 경기의 최고 성적이었다. 목표는 15위 안에 진입하는 것이었지만, 18위 그 자체로도 대단한 기록이다. 그리고 4인승 경기가 남아 있었고, 나는 새벽까지 그들의 레이스를 기다렸다.  

결국, 난 어디에서도 윤종이의 봅슬레이 경기를 보지 못했다. 올림픽 중계를 맡은 국내 방송 3사(KBS, MBC, SBS) 어느 곳에서도 봅슬레이 4인승 경기 3, 4차 레이스를 생중계하지 않았다. 같은 시간대 23일 새벽, 김연아가 참가한 피겨스케이팅 갈라쇼를 3사가 동시에 중계했기 때문이다. 방송사 한 곳이라도, 아니 갈라쇼를 하는 중간이라도 잠시 중계를 해줬다면 어땠을까? 참 씁쓸했다.  

2014년 소치올림픽의 키워드는 안현수, 혹은 빅토르 안이었다. 고질적인 빙상연맹의 파벌 문제와 안현수의 활약은 대한민국 스포츠계에 큰 논란을 가져왔다.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메달권에 들지 못해서, 혹은 금메달을 따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연신 반복한 채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반면에 경기를 마치고 유난히 자신만만하게 즐거운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거나 관중에게 손을 흔드는 선수들이 있다. 바로 봅슬레이 국가대표 선수들이다. 그들이 경기에 임하는 자세와 표정에는 여유와 설렘이 묻어난다. 노력의 높낮이가 아니라 만족의 차이가 경기를 마친 선수들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2014년 인천아시안 게임에서 정구 2관왕에 오른 김형준 선수의 경기를 인터넷 중계로 시청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화제가 됐다. 비인기 종목에 대한 지원 부족과 무관심은 파벌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고질적인 문제다. 국가대표로 올림픽과 국제대회에 참가했다 하더라도, 방송 중계를 통해 그들의 경기를 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극복한 '간절함'

▲ 여자 축구 국가대표 지소연 선수


<SBS 스페셜> '우리는 왜 공에 열광하는가' 편에서 만난 지소연, 윤경신, 차유람 선수가 이야기하는 공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들의 공에는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극복한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스포츠 종목 앞에 '여자'라는 단어가 붙으면 대부분 비인기 종목이 된다. 여자 축구, 여자 야구처럼 말이다. 여자 축구 선수들은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하는 남자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래가 더 불확실하다.

축구 선수 지소연의 현재 소속팀은 세계적인 축구 명문 '첼시 FC 레이디스'팀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수지만, 지소연을 제외하고 여자 축구 선수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2010년 여자 월드컵이 끝나고, 밀려오는 수많은 방송 취재 요청 때문인지 그녀는 조금 지쳐 보였다. 인터뷰 전에도 대한축구연맹에서 개최한 행사에 참여하고 도착했다며 깍듯하게 인사를 건넨다.

그라운드 위에서의 폭발적인 경기 모습만 보다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눈 그녀는 앳되고 수줍음 많은 소녀였다. 경기에서 질 때는 너무 힘들고 속상하지만, 득점하는 순간의 짜릿함 때문에 축구를 계속한다고 했다.

"이젠 축구공을 발에서 뗄 수 없게 됐어요. 어렸을 때부터 공만 보고 달려왔거든요. 축구공은 제 모든 것이자, 앞으로도 함께 할 존재입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할 때면 반짝 주목을 받는 종목들이 있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으로 유명한 핸드볼,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효자 종목인 양궁과 사격, 레슬링, 유도 등이다. 대부분 비인기 종목이다. 몇 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관심이지만, 선수들은 그마저도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인다. 세상 어디에도 당연한 메달은 없다. 기대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을 때의 비난은 선수가 오롯이 감당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의 세계적인 구기 종목 선수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축구의 박지성, 야구의 박찬호, 배구의 김연경 등 뛰어난 선수들이 많다. 그리고 핸드볼의 윤경신을 빼놓을 수 없다. 세계적인 수준의 독일리그에서 1997년부터 2002년까지 6년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고, 수천 명의 팬들을 몰고 다니는 슈퍼스타였다. 올림픽, 세계 선수권, 아시안 게임에서 모두 득점왕을 차지한 그는 2002년 세계 핸드볼 연맹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단언컨대, 코트 위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의정부의 한 초등학교에서 만난 윤경신과 두산 핸드볼팀(현재 윤경신이 감독을 맡고 있는 팀이기도 하다).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선수들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공 사이에서 윤경신 의 큰 키와 날렵한 몸매는 단연 돋보였다. 아직은 몸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 훈련 강도가 세지 않다고 했지만 선수들의 파이팅과 열기는 뜨거웠다. 

체육관에서 학생들이 연습하는 소리가 들리자 윤경신은 직접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핸드볼을 위해서 하는 건데요, 뭘."

그는 멋쩍게 대답했다. 한마디로 "30년 넘게 함께 한 친구이자, 상대를 위협하는 폭탄 같다"는 공의 의미보다 인터뷰 전에 "핸드볼을 위해서 한다"고 했던 말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뭘까. 참 멋진 선수다. "수고했다"며 악수를 청하는 손은 또 왜 그리 큰지.

사실 피겨와 수영, 배드민턴을 인기 종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김연아, 박태환, 이용대라는 스타가 등장해서 주목을 받았던 것이지, 그들을 빼놓고 보면 여전히 비인기 종목이다. 협회의 착오로 도핑테스트를 받지 못해 경기 출전이 제한된 이용대, 올림픽 포상금 문제로 홈쇼핑까지 등장해야 했던 박태환을 보며 안타까움을 넘어선 분노를 느꼈다. 지소연, 윤경신, 차유람도 인터뷰를 마치면서 하나같이 당부했던 것이 바로 '관심'이었다.

뛰어난 실력과 단아한 외모로 주목을 받고 있는 차유람을 만나러 태릉선수촌을 가는 길. 제작진들은 그 어떤 인터뷰 때보다 조금 들떠 있었다. 노란 국가대표 운동복을 입은 그녀의 말투와 행동은 당당하고 발랄함이 넘쳤다. 공은 결코 자신의 편이 아니라 언제나 이기고 넘어야 하는 상대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당구는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전하고, 또 도전하게 되는 블랙홀이죠."

인터뷰 내내 "배고파요!"를 외쳤던 그녀는 오랫동안 이어진 촬영에도 웃는 모습으로 최선을 다했다. 정식 경기가 아니었음에도 공을 바라보는 매서운 눈빛이 참 인상 깊었다.

얼마 전, 캐나다 캘거리에서 봅슬레이 국가대표 훈련을 하고 있는 윤종에게 연락이 왔다. 대표팀 모두 열심히 훈련하고, 잘 지내고 있단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평창올림픽에서는 꼭 메달을 따고 싶다는 녀석의 목소리가 자신만만하다. 무엇보다 재미있다고 한다.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앞으로 봅슬레이하면 자메이카의 <쿨러닝> 대신 우리나라 봅슬레이 국가대표팀을 먼저 떠올려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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