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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귤 Apr 10. 2021

아무도 없는 바다

옛사랑과 새 사랑

  제주에 살면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예쁜 바다를 아무도 없을 때 혼자 누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고 싶은 바다를 찾아가서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면 멍하니 허리가 아플 때까지 앉아 있어도 된다. 바다를 걷다가 잠시 멈춰 벤치에 앉아 푸른 바다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어느새 세네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왜 최유수 작가님이 '아무도 없는 바다'라는 책을 썼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바다는 고요하게 내 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항상 뭔가를 해야 직성이 풀리던 내가 멍때리는 것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제주도에 와서 처음 알게 되었다. 예전엔 여유 시간이 생기면 영화를 보든 친구를 만나든 뭐든 활동을 해야 했고 약속이 없는 날은 혼자 쇼핑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렸다.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제주도에 와서는 쉬는 날 멍하니 있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파도 소리만 들리는 아무도 없는 해변을 걷다가 벤치에 앉아 멍하니 먼바다를 바라보면 '행복하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오게 된다. 


  늦은 밤 충동적으로 바다를 보러 갈 수 있는 것도 제주도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호사이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멀리 보이는 고깃배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한 채 파도 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많은 생각들이 파도와 함께 묻힌다.


  하루는 외로움에 잠이 오지 않아 늦은 밤바다에 간 적이 있다. 제주도에서는 어딜 가도 연인들이나 가족, 친구들끼리 온 여행자들로 넘친다. 혼자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면 속으로 '나도 여자 친구가 생기면 같이 와야지!'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은연중 생각들이 내 마음속에 외로움을 조금씩 쌓았던 것 같다. 이날은 이러한 외로움이 가득 찼고 비워줘야 할 시간이었나보다. 


  20대 초반 순수했던 시절 나는 진정한 첫사랑을 만났다. 미래를 위한 준비로 공부를 해야 했던 시기였지만 내가 학원에 가는 이유는 공부가 아닌 한 여자를 보기 위함이었다. 내 친구들과 나는 그녀를 오렌지 걸이라고 불렀다. 항상 주황색 가방을 메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녀가 듣는 수업을 같이 듣기 위해 관심도 없던 선생님의 수업을 신청해서 듣기도 했고 근처에 앉아보려고 수업보다 1시간 일찍 와서 자리를 맡기도 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수업에 그녀가 보이지 않는 날에는 어디 아픈 건 아닌지, 무슨 일이 생겼는지 괜스레 걱정됐다. 


  그때 감정을 돌이켜보면 '그냥 좋았다.'라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될 것 같다. 그녀가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모습도 예뻐 보였고 사물함을 여는 행동마저 고고해 보였다. 집에 가는 길에 밤하늘을 보며 그 여자를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고 피곤하고 지친 수업 중 그 여자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여자가 어떤 것을 준비하는지 미래나 과거 배경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떠한 목적도 없었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관계가 잘 진전이 돼서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것 그리고 학원이 끝나면 같이 밤하늘을 보며 집에 가는 것이었다. 


  오며가며 인사라도 하고 싶어 어떻게 말을 걸어볼지 수능시험이 끝나고 대학을 정할 때보다 더 신중히 고민했다. 처음 말을 거는 것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부담스러워서 앞으론 볼 수도 없게 될까 봐. 나는 수업을 핑계로 용기 내서 처음 말을 걸었고 그것을 시작으로 어느새 눈이 마주치면 인사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운이 좋게도 학원 앞 카페에서 그녀와 커피를 한잔할 수 있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기로 한 날 나는 가방을 메지 않고 학원에 갔다. 가장 아끼던 청바지와 셔츠를 입었다. 그 셔츠는 당시 나름 인기 있었던 아베크롬비 셔츠로 며칠간 주먹밥만 먹어가며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저축해서 해외직구로 산 것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오랜 준비를 해서 학원으로 갔고 학원까지 가는 길에 거울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몇 번이나 들렀는지 모르겠다. 학원 앞에서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던 그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눈웃음은 손예진보다 훨씬 예뻤다. 꿈인가 생시인가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카페로 갔다. 그때의 상황과 마셨던 커피까지 전부 생생히 기억이 난다. 빽빽한 구름으로 해가 들어오지 못한 날, 학원 앞에 있던 던킨도너츠의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아 스무디를 마셨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했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툴렀던 대화가 문제였을까? 내 셔츠가 너무 초라했나? 카페에서의 만남 이후에 그녀와 마주치면 목례인지 눈을 피하려 머리를 숙이는 건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고 시험이 끝나고는 연락이 끊겨버렸다. 그해 12월 눈 오는 어느 겨울날 그녀 생각이 많이 났다. 시험이 끝나면 집 근처 미스터피자에서 아르바이트할 것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무작정 지하철을 탔다. 호기롭게 찾아갔지만, 막상 도착하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마 들어가진 못하고 건너편 건물에서 조용히 피자집만 보다가 집에 돌아왔다.

  이때의 마음이 지금 참 그립다. 나는 20대 후반 제2의 사춘기를 겪은 것 같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족족 분수에 맞지 않는 비싼 옷을 사고 좋은 것을 먹고 놀며 사치를 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마음에 드는 여자는 일단 가서 연락처를 물어봤다. 지금 생각하면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운이 좋게 연락처를 받으면 데이트를 마치 숙제하듯이 하나하나 풀어갔다. 멋진 파스타 집에서 첫 식사를 하고 날이 좋은 날 여느 커플들처럼 한강에서 산책도 했다. 이 와중에 내 마음속 마지막 목표는 오로지 그녀와 자는 것이었다. 그녀와 자고 나면 뭔가 내가 사랑을 얻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고 금방 끝이 났다. 


  그때 내 마음은 어두웠고 사랑 또한 검었다. 여러 번의 짧은 만남 끝에 이제는 돌아가 보기로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혼자 밤바다를 걸으며 되뇌고 또 되뇌었다. 사랑에는 정답이 없지만 내가 했던 사랑은 나와 맞지 않는 옷이었던 것 같다. 이날 밤 나는 옛사랑과 외로움을 비우고 새 사랑으로 마음을 채웠다. 


건축학개론 촬영지

가끔 옛사랑이 떠오를 때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본다. 딱히 이유는 없지만, 소리와 영상이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고나 할까? 제주도에는 건축학 개론 촬영지가 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고 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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