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맥주 그리고 막걸리
제주도를 여행할 때 가장 큰 적은 날씨가 아닐까 싶다. 바다와 산 등 야외 관광지가 많은 제주에서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올 때는 갈 수 있는 장소들의 선택지가 줄어든다. 나도 친구가 놀러 왔을 때 날씨가 안 좋으면 어딜 가야 할지 몰라 인터넷에 '비 오는 날 제주 갈만한 곳'이라고 검색을 한 적이 많다. 나 혼자라면 그냥 집에서 쉬었겠지만 멀리서 온 친구에게 그냥 숙소에서 쉬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온종일 카페만 주야장천 돌아다닐 수도 없었기에 여러 가지 체험도 해보고 몇몇 박물관과 숲길을 가보았다. 생각보다 좋았던 곳들이 많아서 기억을 더듬어 비가 오는 날 제주에서 할만한 일들을 정리해보았다.
비 오는 날에는 막걸리에 파전이 생각나고, 어두컴컴 우중충한 날에는 내 마음을 맑게 닦아주듯 알코올이 유독 부드럽고 달달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제주에는 소주, 맥주, 막걸리, 와인, 브랜디까지 다양한 지역 술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을 굳이 세 손가락에 꼽아보자면 한라산 소주, 제주 맥주, 우도 땅콩 막걸리가 아닌가 싶다.
한라산은 무려 70년의 역사를 가진 제주 향토 기업으로 제주도에서는 어느 식당에 가도 음료 쇼케이스 가장 앞줄에서 한라산을 만나볼 수 있다. 한라산은 화산섬인 제주도에서 나는 깨끗한 암반수를 사용해서 만드는데, 물이 좋아서 그런지 어떤 사람들은 한라산 소주가 일반 소주보다 부드럽고 달다고 한다. 요즘엔 인기가 많아져서 육지에도 한라산과 토닉워터를 섞어 마시는 한라 토닉이라는 메뉴를 파는 가게가 생기고 한라산 소주를 볼 수 있는 곳이 많아졌다.
제주맥주는 2017년 첫 제품을 출시한 신규 브랜드로 한라산 소주에 비하면 신생아에 불과하다. 하지만 위트 있는 디자인과 개성 있는 맛으로 매년 엄청난 성장을 거듭했고 단기간에 국내 맥주 브랜드 TOP 5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제주 맥주는 제주에서 탄생한 브랜드답게 이곳에서 많이 접할 수 있는 음식인 회와 흑돼지에 잘 어울리는 맥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디자인이 무척 제주스러워서 편의점 진열대나 식당의 음료 냉장고에서 이 맥주를 마주하게 되면 안 마셔보고는 못 배길 것이다.
제주에는 생유산균 막걸리와 귤 막걸리, 우도 땅콩 막걸리 등 전통방식으로 만드는 지역 막걸리가 있다. 도민들의 최애 막걸리는 생유산균 막걸리이지만,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것은 우도 땅콩 막걸리인 것 같다. 땅콩 막걸리는 제주도 내 마트나 술집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는데 주의해야 할 점은 땅콩만 우도에서 가져가 육지에서 만드는 막걸리와 우도에서 만드는 막걸리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더 맛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내 입맛에는 우도에서 만든 땅콩 막걸리가 조금 더 부드럽고, 고소하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유산균 막걸리처럼 생(生)이라는 글자가 붙어있는 생막걸리가 있는데 이것은 살균 열처리를 하지 않아 효소와 유산균이 살아있어 청량감이 좋고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생(生)막걸리는 쉽게 상하기 때문에 유통기한이 2주 정도로 짧아 그 지역이 아니면 맛보기 힘들다고 한다. 오리지널 제주 전통 막걸리를 맛보고 싶다면 막걸리를 사기 전에 생산지와 생(生)자를 확인해보자.
제주맥주와 한라산 소주는 술뿐만 아니라 관광객에게 재미난 체험도 제공하고 있다. 제주의 서쪽 한림읍에는 한라산 소주와 제주 맥주 공장이 있는데 예약을 하고 가면 가이드와 함께 공장을 둘러보는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술을 만드는 과정을 보고 듣고 느끼며 마지막엔 시음도 할 수 있어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오감으로 맥주와 소주를 접해볼 좋은 기회이다.
나는 평소 술을 잘하지 못해 이러한 체험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술을 좋아하는 한 친구 덕분에 제주맥주 공장 투어를 함께 가볼 수 있었다. 공장에서 투어를 진행한다고 해서 조금은 너저분할 거라 생각했지만 도착하자마자 반짝반짝 깨끗한 체험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내부 펍에서 맥주를 한잔 마시며 잠시 기다렸다가 가이드님 한 분과 10명 정도가 모여 투어를 진행했다.
투어를 진행 하는 동안 가이드님이 양조 과정에 대해 알차면서도 쉽게 설명을 해주셔서 귀에 쏙쏙 들어왔다. 1시간의 짧은 투어였지만 맥주가 만들어지는 원리와 맥주의 종류 등에 대해 얕게나마 배워볼 수 있었고 중간중간 맥주를 맛있게 마시는 팁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술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고 맛도 잘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나에게도 너무 재밌는 시간이었다. 투어를 하고부터는 제주 맥주를 마실 때 이 맥주에 무엇이 들어갔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마시게 되니 왠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제주맥주는 신생기업이라 그런지 홍보를 위해 투어 프로그램에 힘을 많이 줬다고 한다. 공장 안 체험관에서는 여러 가지 굿즈도 팔고 있었고 시설도 깨끗했다. 거기다 투어를 진행하시는 가이드님도 전문적이셨고 체험하는 루트도 체계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양조장 내부 펍은 따로 술집으로 운영해도 좋을 만큼 잘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조금 아쉬웠던 점은 공장이 외진 곳에 있어 운전해서 오는 경우가 많을 텐데 운전자는 신선한 생맥주를 맛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도 운전 때문에 맥주를 마시지 못했었는데 다음에 맥주를 좋아하는 친구가 온다면 그때는 택시나 버스를 이용해 꼭 다시 한번 방문하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운영 중인 공장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이라 투어 시간과 날짜가 많지는 않다. 따라서 방문 전에 투어 시간에 맞춰 일정을 잘 조율해야 한다.
비가 오는 날 여행의 계획이 틀어졌다고 너무 슬퍼하지만 말자. 그날은 나의 이성의 끈을 잠시 놓아주는 날로 정해 일정을 줄이고, 양조장 투어도 하고 여러 제주 지역 술을 맛보며 술 소믈리에 체험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맛있는 안주도 준비하고 종류별로 술을 사서 일찍 숙소에 들어가 좋은 사람 혹은 좋은 책, 영화와 함께 하루는 온전히 취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