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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귤 Apr 10. 2021

꽃(花)-2

6월부터 12월

  결혼식 부케로 많이 쓰는 수국은 조금만 건조해져도 바로 말라버리는 연약한 꽃이다. 하지만 물속에 담가 두면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살아나는데, 어떤 사람은 이 모습을 마치 '나를 봐달라고 시위하는 것 같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약한 모습과 반대되게 수국은 온도와 양분이 적합한 환경에서는 다른 어느 꽃보다도 오랜 시간 피어 있는데, 부케로서의 수국은 항상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사랑을 유지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까? 


  수국이 피는 6월, 제주도에 오면 곳곳에서 활짝 핀 꽃을 마주할 수 있다. 수목원들은 너도나도 수국 축제를 하고 카페나 식당의 정원에도 작은 수국 파티가 열린다. 그중에서도 제주도의 유명한 수국 명소로는 혼인지, 종달리 수국길, 안덕면사무소 앞 정도가 있다. 수국은 드넓은 평야를 가득 채우는 그런 꽃은 아니지만, 제주도 구석구석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꽃인 것 같다. 나는 수국을 보기 위해 명소를 찾아다니지 않았지만,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6월 사진 곳곳에서 수국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롯가에 핀 수국을 보고 무심히 지나친 적이 많았는데 다음에 본다면 오래오래 필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을 주어야겠다.

6월의 수국

  돌이 많고 바람이 많이 불어 농사가 잘되지 않았던 척박했던 제주의 땅. 이곳에서 잘 자라 준 작물이 있었는데 바로 메밀이다. 불량환경에서도 잘 자라 주어 메밀은 예로부터 제주에 흉년이 들 때면 주식으로 사용되는 구황작물이었다고 한다. 


  나는 넓은 정원이 있는 카페 겸 영농 체험장 '보롬왓'에 갔다가 우연히 메밀꽃을 보게 되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꼭 실려있던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 덕분에 나에게 메밀꽃은 이름만은 정말 익숙한 꽃이었다. 하지만 메밀꽃을 메밀꽃이라고 알고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에는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소설가는 메밀밭을 소금 가루 들판에 비유했었는데 실제 모습을 보고 정말 이 이상의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찰떡이었다. 하얀 꽃들이 초록 들판을 뒤덮고 있는 모습은 정말 하늘에서 누군가 소금을 한 움큼 뿌린 것 같았다. 빛이 없어도 반짝반짝 빛날 것 같은 새하얀 메밀밭이 밤에 달빛을 받으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다. 다음에는 나도 소설의 주인공처럼 달이 밝은 어느 저녁에 메밀꽃밭 사이를 걸어봐야겠다.


  9월이 되면 메밀밭을 제주 전역에서 볼 수 있는데 오라동 메밀꽃밭은 그중에 가장 크고 풍경이 좋아 매년 메밀꽃 축제를 한다. 25만 평 규모의 거대한 메밀밭이 평지가 아닌 중산간에 자리해있어 뻥 뚫린 전망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고 한다. 구름과 나란히 서서 새하얀 메밀밭뿐만 아니라 제주 시내도 조망할 수도 있다고 하니 축제 기간에는 이곳을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9월의 메밀밭

  요즘 SNS에서 핫하다는 핑크 뮬리밭을 제주도에서도 볼 수 있다. 핑크 뮬리는 초지나 공유지가 아닌 개인이나 기업이 운영하는 카페에 관상용으로 심어 놓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핑크뮬리를 보기 위해서는 대부분 입장료를 준비해 가야 한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식물에 대한 궁금증으로 나는 핑크 뮬리로 유명하다는 카페 글랜코에 가보았다.


  스코틀랜드의 글렌코 지역의 초원을 모티브로 하여 꾸몄다는 카페 글렌코에는 거대한 정원이 있다. 정원 중에도 거대한 핑크 뮬리밭은 인생 포토스폿으로 입소문을 타서 가을에는 북적이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때도 커피를 주문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줄을 서야 했고 내부에는 앉을 수 없었다. 음료를 주문해야 정원에 입장할 수 있는데 어떤 곳은 조그마한 꽃밭을 가꿔놓고 입장료를 따로 받는 곳도 있어 그런 곳에 비하면 합리적인 것 같았다. 


  정원에 들어가자마자 거대한 핑크 뮬리밭이 보였다. 주차장에서부터 슬쩍 보이긴 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더 넓어 보였다. 곳곳에 웨딩촬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커플이든 싱글이든 모두 사진 찍기 바빠 보였다. 꽃에 경계를 쳐놔 핑크뮬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했던 것이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규모만은 제주에서 봤던 핑크 뮬리밭 중에 가장 넓은 것 같았다. 이외에 동백꽃과 수국 등 다른 꽃밭도 가꾸고 있는 것 같았는데 아직 시작 단계인 듯했다. 핑크 뮬리를 보지 않더라도 어떤 카페와도 비교되지 않을 넓은 초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따뜻한 봄에 야외에 앉아 초록 초록한 풀들과 광합성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북촌에 가면-카페 글렌코 10월의 핑크뮬리

((꽃에서 보기 드문 따뜻한 분홍색을 가졌다는 것과 꽃이 많이 져가는 가을에 핀다는 점은 핑크 뮬리만의 큰 매력인 것 같다. 그리고 화려한 것 같으면서 톤 다운된 색이 주인공을 빛나게 해주어 예쁜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카페의 울타리 안 정원에 빼곡히 심겨 있는 핑크뮬리의 모습은 살아있는 꽃이 아닌 전시품 같았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럴까? 눈으로만 보기에는 나에겐 동백꽃이나 유채꽃 같은 꽃이 더 아름다웠다.))


  제주도의 겨울은 조금 쓸쓸하다. 파라솔로 가득 찼던 해변은 텅 비어있고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가던 오름길에도 낙엽이 쌓인다. 하지만 이렇게 외로운 겨울에 어두워진 제주를 밝게 수놓으며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있는데 바로 동백꽃이다.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꽃을 보기 위해 수목원에 간 적이 있다. 날씨가 추워지고 바람이 많이 불면서 카페나 실내 관광지만을 주로 다니던 때에 카멜리아 힐은 가뭄 속의 단비 같은 곳이었다. 카멜리아 힐은 이름부터 동백나무 언덕으로 동양에서 가장 큰 동백 수목원이라고 한다. 동백나무는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서만 주로 볼 수 있는데 다른 꽃들이 다 지고 난 추운 계절에 홀로 피어 사랑을 듬뿍 받는다고 한다. 


  동백꽃은 정말 꽃 하면 딱 생각나는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분홍색, 흰색, 붉은색 등 화려하고 넓은 꽃잎을 가진 동백꽃은 '곱다'라는 말이 너무 잘 어울렸다. 가끔 어머니들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면 꽃을 확대한 사진을 볼 수 있었는데 나도 늙은 것인가? 그 마음이 이해됐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고 같이 와서 보여주고 싶었다. 제주를 떠나더라도 앞으로 찬 바람이 부는 겨울이 오면 칙칙했던 내 마음을 밝게 수놓아준 제주도 동백이 가끔은 생각날 것 같다.

카멜리아힐 동백꽃(12월 13일)

  10월 말 ~ 11월 초 억새와 핑크 뮬리가 시들어가고 동백이 피기 전 제주도에 와서 아무런 꽃도 보지 못했다고 서운해하지 않아도 된다. 동백으로 제주도를 붉게 물들이기 전 예열이라도 하듯 주황빛으로 제주도를 따스하게 감싸주는 단풍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에는 *곶자왈이 많아서 단풍이 우거진 숲을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 육지처럼 화려한 단풍축제를 하진 않지만 소소하게 가을을 즐길 장소들이 구석구석 있다. 그중에 단풍을 좋아하는 제주도민들이 이 시기만 되면 꼭 찾는 장소가 있는데 바로 천아숲길이다. 


  천아숲길의 단풍나무는 물이 마른 계곡을 따라 줄지어 있는데 하얀 바위들이 붉은 단풍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매일 새파란 바닷길만 걷다가 붉게 물든 숲길을 걸어보니 기분이 색달랐다. 바닷길은 시원한 파도 소리로 내 마음을 씻어주는 곳이라면 숲길은 알록달록 이불로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곳이었다. 붉게 물든 단풍이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쓸쓸하고 허해진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한라산 둘레길 중의 한 곳인 천아숲길은 천아수원지에서 돌오름까지 약 10.9km 구간이다. 이 중에 단풍이 가장 풍성한 곳은 천아수원지 쪽 천아숲길 입구부터 약 1.5km 정도라고 한다. 따라서 단풍만 보기 위해 간다면 끝까지 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짧은 구간을 가더라도 돌길이 많고 경사가 급해 운동화는 필수이다.


((*곶자왈= 제주말로 숲을 뜻하는 '곶'과 가시덤불을 뜻하는 '자왈'이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로 화산지형에서 나무와 덩굴식물 등이 뒤섞여 원시림을 이룬 곳. 곶자왈은 덩굴과 북방한계 식물,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해서 울창한 단풍 숲을 보기는 힘들다.))


천아숲길 단풍(11월 9일)

  인터넷을 조금 더 찾아보면 섬 전체가 정원인가 싶을 정도로 코스모스, 튤립 등 다양한 꽃들을 제주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효원, 한림공원, 휴애리자연생활공원 같은 수목원에서는 약간의 입장료만 내면 언제 가도 계절에 어울리는 꽃들을 구경할 수 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보고 싶은 꽃의 개화 시기에 맞춰 제주도를 방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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