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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귤 Apr 10. 2021

박물관과 미술관

빛과 어둠

  제주도에는 유독 박물관과 미술관이 많다. 국립제주박물관, 민속자연사박물관, 해녀박물관 같은 곳에서는 제주의 깊은 속살을 볼 수 있고 취향에 따라 자동차 박물관, 초콜릿 박물관, 커피 박물관 같이 특별한 테마가 있는 박물관에 가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예술작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마니아적인 취미도 없어 제주도의 박물관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홀로 제주 동쪽을 여행하던 중 비를 만나 갈 곳을 잃은 적이 있다. 멀리까지 왔는데 이대로 집에 가기는 아쉬워 주변에 갈만한 곳을 찾아보았고 우연히 '빛의 벙커'라는 전시관에 가보게 되었다. 이곳이 내가 제주도에서 방문한 첫 번째 전시관이었고 이날은 내가 제주도의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을 가보게 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빛의 벙커'는 사용하지 않던 비밀 벙커를 리모델링해 미디어아트 전시관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사실 나는 빛의 벙커를 방문하기 전까지 미디어아트라는 것이 뭔지 몰랐고 미디어아트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다. 미디어아트와 첫 만남에 무엇이 있을까 두근두근 기대하며 표를 끊고 내부로 들어갔다. 입장하자마자 화려하고 거대한 그림과 웅장한 사운드가 나를 맞아주었다. 수십 대의 빔프로젝터가 콘크리트 벽면에 미술 작품을 쏘아주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선명하게 그리고 빈틈 하나 없이 벽과 그림을 연결했는지 신기했다. 내가 갔을 때는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이라는 화가의 작품을 보여주었는데 유명한 그림들이라 그런지 어디선가 본 듯 익숙했다.

빛의 벙커

  전시는 벙커의 벽면에 화면이 바뀌면서 진행되는데 한 사이클이 50분 정도라고 한다. 한자리에 앉아서 알록달록 변화하는 거대한 그림을 보니 마치 한 편의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관람은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화면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며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곳곳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음악과 함께 화려한 명화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새롭고도 특이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전시 해설이나 어떠한 설명 없이 바뀌는 그림들만 보다 보니 금방 지루함을 느꼈다. 나는 한 사이클이 채 끝나기 전에 나오고 말았다. 아까운 입장료.... 그래도 이곳에서 전시하는 작가에 대해 잘 알고 이전에 액자 형식의 작품을 봤던 사람에겐 흥미로운 전시가 될 것 같았다.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추천하기 힘들 것 같지만 사진이 정말 잘 나오기 때문에 인생 사진을 남기고 싶은 여행자들은 한 번쯤 가볼 만한 장소인 것 같다.


  이와 비슷한 장소로 아르떼 뮤지엄이라는 미디어아트 전시관이 2020년 하반기에 제주도에 새로 오픈을 했다. 이곳은 명화만 전시하는 빛의 벙커와는 다르게 폭포, 해변, 정글 등 자연풍경을 미디어로 표현해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새로운 감각적인 몰입을 제공한다고 한다. 현재는 생긴 지 얼마 되지가 않아 많은 사람이 몰려서 전시물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선다고 하는데, 방문 열기가 조금 수그러들 때쯤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미술관에 가면 그림이나 역사에 대해 공부하기보다 '작가가 어떤 생각을 하며 그림을 그렸을까?' 고민하며 작가의 감정에 이입해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보거나, 작품과 상관없이 혼자만의 잡생각을 정리하며 주로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의 정성과 고뇌가 담긴 작품들 사이에서 조용히 생각하다 보면 작가의 에너지를 받아서 그런지 척척 결단을 내리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박물관을 가는 것은 숲길을 걷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비자림과 김택화 미술관

  그래서인지 내 박물관 취향은 카페와 조금 비슷하다. 특정한 주제나 작품을 찾아다니기보다 공간 자체를 중요시하는 편이기 때문에 걷기에 답답하지 않게 널찍하고, 조용하고, 오래 있어도 질리지 않는 심플한 곳이 나와 잘 맞는 것 같다. 그러한 장소를 찾아보다가 눈에 띈 곳이 바로 본태박물관이다.    


  제주도에는 안도 다다오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 있다. 나는 제주도에 와서 안도 다다오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한다. 건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제주도에 오면 꼭 한 번은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보러 간다고 하는데, 섭지코지에 있는 유민 미술관과 글라스하우스 그리고 본태박물관에서 안도 다다오의 건축 감성을 느껴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내 취향에 따른 선택을 굳게 믿고 황금 같은 휴일 하루 시간을 내 박물관에 찾아가 보았다. 본태박물관은 외진 위치와 조금은 비싼 입장료 때문에 방문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았다. 입구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도슨트가 있다는 안내 푯말이 나를 들뜨게 했다. 나는 예술에 대해 아는 것은 없지만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해 작품 해설이 있으면 꼭 따라다니며 듣기 때문이다.


  표를 끊고 도슨트 시간에 맞추기 위해 박물관을 가볍게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어 차 소리도 나지 않았고 사람들도 적어 전체적으로 고요한 분위기였다. 작은 정원과 연못이 걷는데 소소한 즐거움을 주었고 산방산이 보이는 전망 좋은 옥상도 있었다. 거기에 노출 콘크리트로 된 세련된 인테리어는 같은 곳을 몇 번 지나가도 지루하지 않게 해 주었다. 정말 내가 원하던 모습과 딱 맞았다.

본태박물관

  도슨트 투어는 2시간 가까이 진행이 되었는데 조금 길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박물관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시간이었다. 이곳은 특이하게 전통과 현대의 작품이 공존하는데 전시물부터 해설까지 일반 박물관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여러 관을 옮겨가며 옛 조선 시대 공예품부터 현대미술 작품까지 보았는데,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뿐 아니라 일상적인 옛 물건에서 본연의 아름다움을 찾아본다는 점이 신선했다. 도슨트께서 시대를 넘나들며 문화와 예술에 대한 설명을 정말 재밌게 해 주셔서 지루할 틈이 하나도 없었다. 평소 해설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라도 이곳을 방문하면 도슨트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도슨트와 함께하는 예술 여행이 끝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떠났고 나는 붉게 물든 박물관을 아쉬운 마음에 조금 더 둘러보다 나왔다. 즐거운 예술 이야기와 아름다운 건축물은 나에게 이곳을 제주에서 가장 평온한 공간으로 기억하게 해 주었다.




부제 : 소심한 바람


  제주도에서 가고 싶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인터넷에 검색하다 보면 한 번쯤은 '저지리'라는 단어를 볼 것이다. 저지리는 제주도 서쪽 중산간 지대의 한 지역의 명칭인데, 이곳에는 제주 현대미술관과 저지문화예술인 마을이 있다. 1999년부터 지역 경제 활성화와 제주 예술의 발전을 위해 예술 마을로 조성을 시작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예술가들을 모집했다고 한다. 먼 섬나라까지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육지의 예술가들을 데려오기 위해 저렴한 가격에 택지를 분양했고 작품을 전시할 공간도 제공했다고 한다. 


  나는 '문화예술마을'이라는 단어에 끌렸고 예술인이 모여 사는 동네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큰 기대를 하고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곳은 여러 블로그나 인터넷 리뷰에 비해 실망스러웠다. 현대미술관이라고 했지만 들어가는 입구부터 주변 정원, 야외 조형물들까지 현대적 감성을 느끼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였다. 매주 월요일은 미술관 휴관 일인데 마침 내가 간 날이 월요일이었고 미술관 내부를 관람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미술관을 뒤로하고 예술인의 마을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미술관 휴관 일이라 그런지 동네가 조용해서 산책하기 좋았다. 몇몇 집은 '역시 예술인은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뻤다. 그런데 깊이 들어갈수록 곳곳에 수풀이 우거진 빈터들이 많이 보였고, 집이 있더라도 잡초로 뒤덮인 정원은 사람이 사는지 알 수 없게 했다. 마치 유령마을 같았다. 동네를 돌아보다 우연히 마주친 강아지가 '월월' 짖었는데 이곳에서 빨리 나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누구를 위한 이정표인가?

  

  집에 와서 찾아보니 예술 마을에 처음에 들어왔던 사람 중 많은 사람이 땅을 되팔고 나갔고, 남아있는 몇몇 예술인도 대부분 그곳을 거주 목적이 아닌 별장처럼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제주에서 예술을 살리기 위해 야심 차게 만들었던 문화예술마을이 부와 명예를 가진 문화인들을 위한 개인적 공간으로 사용되고 버려져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예술인 마을이 재정비되고, 문화예술 부흥이라는 취지에 맞는 적합한 예술인들이 들어와서 활력을 불어넣어 저지리가 제주의 대표 복합 문화예술공간으로 발돋움했으면 한다.


  제주는 매년 천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관광객들은 일상생활하는 동안 꾹꾹 참아왔던 소비 욕을 풀 곳과 추억을 남길 멋진 사진 포인트를 찾기 마련이다. 이러한 특성이 제주를 미술관, 박물관을 짓기에 매력적인 장소로 만든 것 같다.


  발 빠른 사람들은 여러 테마를 가진 박물관을 짓기 시작했고, 어느덧 제주도에는 약 100여 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생겼다. 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졌고 한눈에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박물관들은 더 커지고, 더 많은 유희 거리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상업적인 유혹에 따라 지어진 많은 박물관은 소장품의 질이나 체험, 교육 등에 집중하기보다 인증사진을 남길 공간이나 기념품 판매 같은 것에 더 열을 올리는 것 같았다. 몇몇 곳들은 재미난 이름만 보고 찾아갔다가 유치한 내용과 적은 소장품에 실망하기도 했고, 이상한 사진 스폿과 잡다한 기념품에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나?'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제주의 많은 박물관이 '박물관'이라는 이름보다 하나의 상업과 유희 공간으로서 '테마파크'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신상 놀이동산의 새로운 기구에 사람들이 몰리듯 관람객들은 새로 지어진 박물관으로 우르르 몰려갔고 규모가 작고 오래된 박물관들은 도태되기 시작했다. 지금 제주도에서 박물관을 찾아다니다 보면 노후화되고 관리가 되지 않는 것 같은 곳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제주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이 없었고 선뜻 소개하기가 어려웠다. 제주도 관(官)에서 나서서 박물관과 미술관에 고유기능을 수행할 책무를 어느 정도 주어, 이러한 문화가 개선돼서 조금 더 질 높은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늘어났으면 한다. 

최고의 예술작품! 제주 자연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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