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이 문제인 이유는?

불평등을 반대하는 철학적 논변

by 탱귤도령

우리는 흔히 불평등이 나쁘다고 말하지만, 그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 물으면 의외로 답변이 궁색해지곤 한다. 누군가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부자를 향한 질투일 뿐이라며 일축하기도 한다. 이 혼란스러운 논쟁에 하버드 대학교의 윤리학 및 정치철학 석좌교수 토머스 스캔런(T. M. Scanlon)은 명료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그의 저서 『불평등은 왜 문제가 되는가(Why Does Inequality Matter?)』 는 상투적인 정치적 구호를 넘어서, 불평등이 우리 사회의 관계와 제도를 어떻게 병들게 하는지 치밀하게 분석한다.


1280px-Adolph_Menzel_-_Eisenwalzwerk_-_Google_Art_Project.jpg 아돌프 폰 맨첼 - 제철소 (1875)


지위의 낙인과 통제의 굴레


스캔런이 꼽는 불평등의 첫 번째 폐해는 '지위 불평등'이다. 지나친 경제적 격차는 사회 안에 굴욕적인 계급 구조를 만든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 썼듯이, 가난한 이들이 대중 앞에 나설 때 수치심을 느껴야 할 정도로 생활 수준 차이가 벌어진다면 이는 그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다. 이는 단순히 돈이 없는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 대등한 인간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는 문제다. 불평등은 물질 차원을 넘어 인간의 자존감과 상호 존중의 관계를 파괴하는 병리 현상이다.


두 번째는 '통제'의 문제다.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면 그들은 타인의 삶을 지배할 수 있는 과도한 힘을 갖게 된다. 부유한 이들은 가난한 이들이 어디서 일할지, 무엇을 소비할지, 심지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까지 결정할 수 있는 힘을 휘두른다. 스캔런은 이러한 통제가 개인의 선택지를 좁힐 뿐만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불평등한 관계를 고착시킨다는 점에서 명백히 부당하다고 지적한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신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꼽힌다. 사람들은 "기회가 공정했다면 격차는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스캔런은 기회의 평등이 얼마나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인지 따져 묻는다. 그는 기회의 평등을 '절차 공정성'과 '실질 기회'라는 두 층위로 나눈다.


절차 공정성은 채용이나 입학 과정에서 인종이나 인맥이 아닌 순수한 '능력'에 따라 선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능력조차도 사실은 사회 제도가 규정한 '제도 의존적' 개념일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실질 기회의 결여다. 실질 기회는 "한 개인의 성공 가능성이 그가 태어난 가족의 경제 배경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담고 있다.


선발 과정이 아무리 공정하더라도 아이들이 능력을 계발할 수 있는 초기 환경 자체가 극심하게 불평등하다면 기회의 평등은 허구에 불과하다.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이 더 나은 교육과 환경을 누린다면, 가난한 아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출발선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스캔런은 진정한 실질 기회가 보장되려면 공교육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부의 세습을 제한하는 등 강력한 국가 개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01.43435792.1.jpg 황재형 - 식사 (1985)


사회적 불평등이 정당화되려면?


스캔론은 사회적 불평등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3단계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고 정리한다.


1. 제도적 정당화: 불평등을 산출하는 직위나 보상 체계 자체가 사회 전체의 이익(생산성 향상, 공공복지 증진 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함을 입증해야 한다.

2. 절차적 공정성: 해당 직위에 사람을 배치할 때 차별이나 연고주의 없이, 직무에 관련된 적합한 기준에 따라 선발해야 한다.

3. 실질 기회: 모든 이가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교육과 환경의 측면에서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


이 중 어느 한 단계라도 무너진다면 불평등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며, "당신은 왜 나보다 더 많이 가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도덕적으로 납득할 만한 답변을 줄 수 없게 된다. 지금 인류가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회가 위 3단계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점은 명확해보인다.


정치적 공정성의 붕괴


불평등은 민주주의의 근간인 정치적 공정성마저 뒤흔든다. 스캔런은 부의 편중이 어떻게 정치적 영향력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돈이 많은 이들은 선거 자금이나 로비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을 당선시키고 정책을 좌지우지한다.


이로 인해 정치인은 가난한 시민의 목소리보다 후원자의 요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며, 이는 모든 시민의 이익을 공평하게 배려해야 한다는 국가의 의무를 훼손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투표권이 있다 해도 그들이 정치인에게 접근하거나 목소리를 낼 자원이 없다면 참정권은 실질적 가치를 잃게 된다. 결국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은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칙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사회를 소수 권력자의 전유물로 전락시킨다.


Steel-workers.-1930.jpg 니콜라이 도르미돈토프 - 제철 노동자 (1930)


지배받지 않을 자유로서의 평등


스캔런에게 평등의 요구는 타인의 자의적 의지에 휘둘리지 않는 '실질적 자유'를 확보하려는 시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독히 가난한 탓에 다른 사람의 부당한 요구(성희롱을 견디며 일하기 등)를 거절할 수 없다면, 그 사회의 불평등은 자유를 파괴하는 주범이 된다. 따라서 세금을 걷어 불평등을 줄이는 정책에 투자하는 일은 부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타인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협상력을 부여하는 정당한 행동이다. 평등과 자유는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평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능력과 성과라는 환상


책의 후반부에서 스캔런은 "더 많이 번 사람은 그만큼 더 가질 자격이 있다"는 이른바 '응분(desert)' 논리를 해체한다.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대개 사회 관습이나 제도의 결과일 뿐, 그 자체로 신성불가침한 권리는 아니다. 스캔런은 우리가 누군가의 뛰어난 재능과 미덕을 칭송하고 존경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왜 특정 액수의 금전 보상으로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고 단언한다.


예를 들어 기업 CEO가 평범한 노동자보다 수백 배 연봉을 받는 것이 타고난 능력이나 노력 덕분이라고 말하지만, 그 능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시장이라는 제도와 협상력의 차이다. 스캔런은 개인의 성과라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운과 사회 인프라 덕분임을 상기시키며, 불평등한 분배를 '당연한 보상'으로 미화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평등을 향한 여정


불평등은 순전히 경제 지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성격을 결정짓는 도덕적 사안이다. 스캔런이 지향하는 평등은 모든 사람의 재산을 똑같이 맞추는 획일적 평등이 아니다. 어떤 사람도 지위 때문에 굴욕을 느끼지 않고, 누구도 타인의 자의적인 의지에 지배당하지 않으며, 모두가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실제로 참여할 수 있는 '관계적 평등'이 그가 이야기하는 평등의 본질이다.


이 책은 불평등을 해결하는 일이 부자들의 돈을 뺏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자선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관계를 회복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필수적 정의의 실현임을 웅변한다. 우리가 왜 불평등에 분노해야 하는지, 그리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 이 책보다 더 깊고 단단한 논리적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 여러모로 보아 작금의 한국사회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책이나 아직도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아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스크린샷 2026-03-23 124147.png Why Does Inequality Matter - T.M. Scanlon,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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