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선동적인 비거니즘 선언문
'비건'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인상이 먼저 떠오르는가? 유머 감각이라곤 없고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팻말을 들고 개인 신념을 강요하는 극단주의자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가는가? 글쎄, 너무 단편적인 인상이 아닐까. 영국의 저명한 동물권 활동가 에드 윈터스(Ed Winters)는 저서 『이것은 비건 프로파간다이다(This is Vegan Propaganda)』 를 통해 비거니즘에 향한 대중의 오해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저자가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프로파간다'라는 단어는 역설을 담고 있다. 축산업계는 자신들의 이익에 도전하는 모든 과학 증거나 도덕 논증을 선동, 즉 프로파간다로 치부하며 논의를 원천 봉쇄하려 한다. 그러나 윈터스는 오히려 대중이 매일 접하는 축산업 광고와 마케팅이야말로 진짜배기 선동이며, 베일에 가려진 도살장의 진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들여다보라고 촉구한다.
전 세계에서 매일 약 2억 2,200만 명의 육상 동물이, 수생 동물까지 포함하면 매일 24억에서 63억 명의 생명이 인간의 식탁에 오르려 죽어간다. 초당 2만 8,000명에서 7만 3,000명의 동물이 살해되고 있으며, 인류가 자연계 위에 구축한 이 잔인한 폭정의 규모는 지구 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이다. 윈터스는 비거니즘이 개인의 도덕성을 심판하는 재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참해 온 불의의 시스템을 해체하고 도덕의 일관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윈터스는 비거니즘이 몇몇 동물 애호가의 주장이 아니라, 우리 대다수가 이미 공유하고 있는 도덕 가치를 행동으로 옮기는 지극히 상식적인 실천임을 설득한다. 우리 중 대다수는 동물을 불필요하게 해치는 것이 잘못이라는 데 동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육식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수적이지 않지만 (정말이다) 우리는 오직 '맛'이라는 찰나의 감각적 즐거움을 얻고자 매년 수천억 마리의 동물을 죽인다. 우리는 개와 고양이는 가족으로 여기며 사랑하면서도, 지능 면에서 개와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더 영리한 돼지는 도축장으로 보내는 모순을 드러낸다.
물론 도축은 합법이다. 그러나 법으로 허용한다고 해서 도덕적 정당성까지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노예제, 아파르트헤이트, 홀로코스트 등은 모두 '합법'이었으나 결코 '도덕적'이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축산업에서 자행되는 거세, 꼬리 자르기, 강제 수정, 새끼와의 강제 이별 등이 법적으로 허용된다고 윤리적으로 옳을 수는 없다. 도덕적 고려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은 지능이나 능력이 아닌 '고통을 느끼는 능력'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행위는 명백한 도덕적 실패다.
동물이 단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과학이 증명했다. 쥐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초콜릿 간식을 포기하고, 돼지는 동료의 스트레스에 반응하며 공감한다. 영장류 학자 프란스 드 발은 동물의 복잡한 능력을 부정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인간중심적 부정'이라 불렀다. 우리는 동물을 '지능이 낮은 존재'로 규정하며 죄책감을 덜어낸다. 통념과 달리 돼지는 개보다 높은 지능을 가졌고, 닭은 수백 명의 얼굴을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있다. 모든 동물은 고유한 선호와 성격을 지닌 개체지만 우리는 단지 미식을 위해 그들의 평생을 고통 속에 몰아놓고, 감금하고 죽인다.
대중은 '인도적 도축'이나 '방목형 농장' 같은 라벨을 보며 죄책감을 덜지만, 윈터스는 이것이 사기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동물 복지 기준이 높다는 국가에서도 인도주의적 인증 시스템은 실제로는 끔찍한 학대 행위를 은폐하는 가림막에 불과하다.
저자는 돼지의 꼬리를 자르고 비좁은 분만틀에 가두는 행위, 우유 생산을 위해 갓 태어난 송아지를 어미에게서 강제로 떼어놓는 행위, 수병아리를 태어나자마자 분쇄기에 넣어 죽이는 행위가 '표준적인' 관행임을 낱낱이 공개한다. 살고 싶어 하는 존재의 목을 자르면서 '인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며, 고통을 줄이겠다는 명목 하에 자행되는 모든 복지 조치는 결국 동물을 더 효율적으로 죽이는 수단일 뿐이다.
동물 살해는 인간에게도 치명적이다. 도살장 노동자는 취약계층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매일 수천 번의 살생을 반복하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비슷한 가해 유발 외상 증후군(PITS)을 겪는다. 이들은 알코올 중독, 약물 남용, 가정 폭력 등에 노출될 확률이 일반인보다 월등히 높다. 윈터스는 우리에게 묻는다. "누군가의 저녁 식사를 위해 다른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는 시스템을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도덕 논의를 제외하더라도 육식 시스템은 생존의 관점에서 지극히 비논리적이다. 전 세계 농경지의 83%를 육류와 유제품 생산에 사용하지만, 정작 이로부터 얻는 칼로리는 세계 섭취량의 18%에 불과하다. 우리는 인간이 직접 먹을 수 있는 곡물을 동물에게 먹여 훨씬 적은 양의 단백질로 바꾸는 비효율적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만약 전 세계가 채식으로 전환한다면, 농경지의 75%를 자연으로 되돌릴 수 있으며 이는 중국, 유럽, 미국, 호주를 합친 면적에 달한다. 또한, 축산업은 교통수단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며, 수질 오염과 토양 침식의 주범이기도 하다. 상업 어업은 폐어구와 저인망 어업으로 플라스틱 쓰레기를 배출하고 해저 지형을 파괴하며 가공할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비거니즘은 이제 개인의 윤리를 넘어 지구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되었다.
왜 우리는 이토록 분명한 증거 앞에서도 변화를 거부하는가? 윈터스는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스스로를 친절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은 육식 습관이 생명 존중 가치와 충돌할 때, 사실을 부정하거나 합리화하는 길을 택한다. "고기는 맛있으니까", "인간은 원래 잡식동물이니까", "식물도 생명이잖아"와 같은 변명은 논리적 반박이 아니라 심리적 불편을 해소하려 쥐어짜 낸 방어 기제일 뿐이다. 집단에 순응하려는 심리도 비거니즘 실천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다. 비건이 되는 일은 다수의 삶과 멀어져 소외감을 느끼게 한다. 사회적 동물로 진화한 인간은 이런 소외감에 극도로 취약하기에 금세 타인의 압박에 굴복한다.
비거니즘은 완벽해지라는 요구가 아니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가치—친절, 자비, 정의—를 행동으로 옮기려는 시도이며, 우리 모두가 이 불의한 시스템의 수동적 공모자에서 의식 있는 개척자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인류가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던지는 철학적 질문이자, 붕괴하는 지구를 구하기 위한 구조 요청이다.
윈터스는 미래 세대가 우리를 돌아보며 "왜 그렇게 명백한 참상을 멈추지 않았느냐"라고 물을 때 당당히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래 세대는 지금의 공장식 축산과 육식 행태를 노예제나 여성 참정권 부정처럼 인류사의 끔찍한 오점으로 기억할 것이다. 이 책은 그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변화를 주도하는 편에 설 것인지 묻는다. 비거니즘은 단순한 식단 제안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고통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당연한 도덕적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매일 세 번의 식사로 세상을 파괴할 수도, 치유할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선택은 오직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