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자유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리지 말아라
미국의 정치학자 패트릭 드닌은 2018년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에서 서구 자유주의가 파탄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시 『자유주의와 그 불만』 에서 자유주의가 현대 대중에게 설득력을 잃었다고 평했다. 철학자 존 그레이는 자유주의와 진보의 망상은 이미 끝났으며 신(新)권위주의가 정치 무대 위로 돌아오고 있다며 비관하는 전망을 내놓는다.
이 황량한 폐허의 현장에서 아흔을 앞둔 한 노학자가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정치의 품격'을 되찾자고 권한다. 20세기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가교를 놓으며 정의론의 지평을 넓혔던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다. 그는 팬데믹이라는 예기치 못한 고립의 시간 속에서 평생의 신념을 집대성한 마지막 '개인적 증언'을 우리 앞에 내놓았다. 『품위 있는 정치를 위한 투쟁: 형용사로서 '자유주의'에 대하여(The Struggle for a Decent Politics: On "Liberal" as an Adjective)』 는 우리가 왜 여전히 자유주의라는 가치를 붙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삶의 '품격'을 지켜내는지 기록한 치밀하고도 간절한 탄원서다.
왈저 논변의 기저에는 그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주디스 슈클라의 통찰이 흐른다. 그는 슈클라의 저작 『일상의 악덕』을 인용하며, 자유주의 도덕의 출발점은 바로 '잔인함을 첫째 죄악으로 꼽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많은 이가 자유주의를 그저 개인 권리나 시장 자유라는 추상적 원칙으로 이해하곤 하지만, 왈저가 슈클라에게서 이어받은 자유주의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도덕이다. 그것은 타인에게 가해지는 신체적·정신적 고통, 즉 잔인함과 위협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태도다.
왈저에게 '자유주의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법을 잘 지키는 것을 넘어, 열린 마음과 너그러움, 그리고 모호함을 견뎌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정치가 아무리 치열할지라도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 곧 상대를 잔인하게 짓밟거나 증오를 동력으로 삼지 않겠다는 도덕적 마지노선이 바로 왈저가 말하는 자유주의의 핵심이다.
왈저는 현대 정치의 비극이 자유주의를 하나의 완결된 이데올로기, 즉 '명사'로만 취급하는 데서 온다고 지적한다. 19세기에 형성된 '자유주의'라는 명사는 이미 우파 자유지상주의에 자리를 내주었거나 공허한 껍데기만 남았지만 대신 그는 자유주의를 다른 신념들을 수식하고 제한하는 '형용사'로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혹은 유대인이나 페미니스트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명사 앞에 '자유주의적(Liberal)'이라는 형용사가 붙을 때, 그 신념은 비로소 품격을 갖추게 된다. 형용사로서 자유주의는 각 신념이 가진 독단주의와 배타성을 경계하고,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회의와 타인을 향한 관용을 불어넣는 장치다. 즉,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그 믿음을 '어떻게' 실천하느냐를 결정하는 품격의 수식어인 셈이다.
오늘날의 정치 흐름을 보자. 선거에서 승리한 지도자가 '인민의 의지'를 독점하고 반대파를 '적'으로 규정하는 비자유주의 민주주의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왈저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정수는 다수결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 갈등의 강도를 낮추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품격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선거에서 진 패배자가 감옥에 가거나 망명할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시민으로서 권리를 보장받으며, 다음 선거에서 승리할 희망을 품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를 감옥에 처넣어라!"라는 선동적인 구호는 정치를 생존을 건 전쟁으로 만들 뿐이다. 자유주의라는 형용사는 권력 행사에 헌법적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정치를 상대를 절멸시키는 수단이 아닌 평화롭게 교대하는 '순환의 과정'으로 변모시킨다.
왈저는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아왔지만,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향한 '거대한 행진'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자라면 20세기 현실사회주의의 처절한 실패를 골수에 새겨야 한다고 본다. 왈저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권위주의나 전체주의 정치로의 회귀를 어떤 형태로든 반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왈저에게 사회주의는 한 번의 혁명으로 완성되는 결승점이 아니라, 매일매일 이어지는 '꾸준한 작업(Steady Work)'의 현장이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는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유혹을 거부한다. 시장의 효율을 인정하면서도, 돈이 권력을 사거나 인간 존엄을 해치지 못하도록 '정의의 영역'을 지키는 데 매진한다. 부자가 비싼 차를 사는 일은 괜찮지만, 그 돈으로 판사의 판결이나 국회의원의 표를 살 수는 없어야 한다. 왈저에게 평등이란 모두가 똑같은 재산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굽실거리거나 비굴하게 굴지 않아도 되는 '지배 없는 관계'를 의미한다. 평등은 중요하지만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도 자유주의적 한계를 존중해야 한다. 형용사로서의 자유주의는 사회주의가 가진 평등의 열망이 전체주의적 폭압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다원주의라는 숨구멍을 틔워준다.
왈저는 코즈모폴리턴들이 애국심과 민족적 소속감을 무시하는 태도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한다. 인간은 구체적인 역사와 문화 배경을 가진 공동체 안에서만 비로소 권리를 누리는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소속감이 도착적으로 변질되어 타인을 향한 증오로 번지지 않도록 자유주의적인 관용을 갖춰야 한다.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는 자국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민족의 자결권을 똑같이 인정한다. 민족을 '혈통과 토양'이라는 배타적 가치에 가두지 않고, 소수자를 포용하며 외부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열린 애국심을 실천한다. 그는 자기검열을 거친 애국심만이 품위 있는 정치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왈저는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대학이 학생들을 모든 불편함으로부터 보호하는 '심리적 대피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진정한 교육이란 자신의 핵심 신념이 도전받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편함과 상처를 견뎌내며 더 깊은 진실을 찾아가는 치열한 과정이어야 한다.
자유주의 교수는 학생에게 특정한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며, 가열차게 회의하고 질문한다. 지식인의 사명은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을 넘어, 자기 진영 안에서도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하며 독단과 오만을 경계하는 데 있다.
지금의 세상을 찬찬히 돌아보자. 왈저가 이야기한 '자유주의'의 형용사를 체화한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국제주의자, 페미니스트, 지식인이 각자의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우파 포퓰리즘에 맞서고, 좌파 권위주의를 비판하며, 배타적 민족주의와 인종, 종교 증오에 저항하고, 국경 너머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다. 성평등 정책을 현명하게 추진하며, 종교 광신주의의 귀환에 맞서 세속적 관용을 옹호한다. 왈저는 우리 곁의 이들이 "품위와 진실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한다.
저자의 이 '개인적 증언'은 완벽한 세상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신념을 지키되, 그 신념이 타인을 향한 잔인한 칼날이 되지 않도록 '자유주의'라는 고삐를 쥐라고 요청한다. 혐오가 일상이 된 세계의 한복판에서, 왈저가 평생에 걸쳐 제련해 온 이 '형용사'는 우리가 광기의 시대를 돌파할 갑옷이 되어준다. 품격 있는 정치는 바로 이 형용사를 갈고 닦을 때 가능할 것이다. 묻는다. 당신은 충분히 '자유주의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