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종식의 과학
전쟁의 시대가 돌아왔다. 전쟁의 참상이 국제 뉴스 헤드라인에 내걸리는 일이 잦아져 이제는 일상의 풍경처럼 느껴질 정도다. 우크라이나의 진흙탕 참호에 시체가 즐비하고, 탄도 미사일이 테헤란 상공을 날아다닌다. 대체 전쟁은 왜 하는 걸까. 전쟁은 아이 잃은 어버이의 눈물이요, 애인의 손도 잡아본 적 없는 청년의 죽음이며, 그저 검댕 묻은 건물의 폐허일 뿐이지 않은가. 왜 우리는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가. 전쟁은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해 온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 고안해 낸 끝낼 수 있는 발명품인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뉴욕타임스》 외 유수 저널에 글을 발표한 과학 저널리스트 존 호건(John Horgan)은 저서 『전쟁의 종말(The End of War)』 로 인류의 가장 오래된 비관주의인 '전쟁 필연론'에 도전한다. 호건의 기획은 야심차다. 그는 다양한 과학 분과 연구와 통계 근거를 바탕으로 전쟁이 생물학적 숙명이 아니며, 우리는 폭력적일 가능성만큼이나 평화로울 가능성이 높고 전쟁은 암 치료처럼 해결 가능한 과학적 문제로 여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전쟁을 피할 수 없는 본능으로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공격 본능을 담은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믿음 때문이다. 전쟁 필연론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리처드 랭엄 등이 주창한 '살인하는 영장류' 가설이다. 이들은 침팬지의 집단 습격 행위를 근거로 폭력이 인간 진화의 보편적 동력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호건은 연구 데이터가 과장되었다고 반박한다. 사실 침팬지들의 집단 살상 비율은 굉장히 낮았다. 최신 연구는 침팬지의 집단 폭력이 인간의 서식지 파괴나 먹이 공급 방식의 변화 같은 외부 환경적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결정적 반격은 또 다른 영장류인 보노보가 제기한다. 인류와 침팬지, 보노보는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하다. 보노보는 침팬지와 달리 섹스와 협력을 통해 갈등을 해결한다.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보노보의 평화적 행동이 인류의 본성을 이해할 때 침팬지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공격성은 고정된 본능이 아니라 환경에 반응하는 가변적 기제에 가깝다. 호건은 우리가 전사가 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문화 압력에 의해 전사의 역할을 '학습'했을 뿐임을 명확히 한다.
우리는 흔히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끊임없이 서로를 죽여왔다고 믿지만, 실제 데이터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고학 발굴 결과, 인류의 수백만 년 역사 중 체계적인 집단 폭력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은 불과 1만여 년 전인 농경과 정착 생활의 시작점과 궤를 같이한다. 최초의 대규모 학살 유적인 '제벨 사하바'(13,000년 전)는 인류 전체 역사로 볼 때 지극히 최근의 현상이다.
전쟁은 인간의 출현과 동시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농경과 인구 밀도 증가, 자원 사유화, 계급 구조 고착화 같은 사회적 발명품들이 결합하여 탄생한 부산물이다. 호건은 마거릿 미드의 통찰을 인용하며, 전쟁은 '불 피우기'나 '요리'처럼 인류가 만들어낸 하나의 도구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모든 나쁜 발명품은 더 효율적인 대안이 등장할 때 폐기되어 왔다.
전쟁이 인간 본성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무너뜨리는 가장 실증적인 증거는 전장의 최전선에 선 병사들의 심리적 상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에서 실제로 적을 향해 총을 쏜 병사는 전체의 15~20%에 불과했다. 대다수 군인은 동족을 살해하는 데 극심한 심리적 거부감을 느껴 사격을 주저하거나 허공을 향해 쐈다. 이후 미군은 조건반사적 사격 훈련과 적의 비인격화를 통해 저항감을 강제로 무너뜨리는 훈련 방식을 도입했다.
덕분에 한국전쟁에서는 발사율이 55%, 베트남전쟁에서는 90%까지 치솟았으나, 참전 용사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비율도 급격히 높아졌다. 이는 인간이 '천성적인 전사'가 아니며, 강제적인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만 살인자로 만들어질 수 있음을 반증한다.
호건은 평범한 인간이 왜 잔혹성을 발휘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과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인용한다. 이 두 실험은 권위에 순응하려는 수동적 성향이 집단 폭력의 근원임을 밝힌다. 짐바르도는 개인 기질보다는 상황의 압박과 구조적 압력이 악행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아우슈비츠나 아부 그라이브의 참상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평범한 인간의 도덕 나침반을 고장 낸 결과였다.
자원 부족이나 인구 과잉이 전쟁을 유발한다는 멜서스적 시각 역시 호건의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 인류학 데이터는 전쟁 발발이 실제 자원의 결핍보다 '미래에 자원이 부족해질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공포'와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전쟁은 생존을 위한 합리적 선택이라기보다, 불안에 잠식된 집단이 내리는 잘못된 선택의 산물이었다.
그렇다면 전쟁은 인류사에서 왜 그토록 보편적이었나? 호건은 전쟁의 근본 원인이 전쟁을 갈등 해결의 유일한 도구로 수용하는 '아이디어'의 전염성에 있음을 시사한다. 전쟁은 일단 발명되면 전염병처럼 주변 사회로 퍼져나가는 특성이 있다. 한 부족이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이득을 취하기 시작하면, 주변 부족들은 생존을 위해 강력한 군사 문화를 체득해야만 한다. 군사주의는 강력한 밈(meme)이 되어, 전쟁을 당연한 삶의 일부로 여기게끔 만든다.
아마존의 와오라니 부족 사례는 문화와 가치관이 바뀔 때 전쟁이 사라질 수 있음을 입증한다. 와오라니 부족은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폭력적인 집단 중 하나로 꼽혔으나, 1950년대에 구성원끼리 평화를 지키기로 합의한 후 급격히 평화로운 사회로 변모했다. 이는 외부 강요나 유전적 변화가 아닌, 공동체의 결단이 빚어낸 기적이었다.
호건은 스티븐 핑커와 존 뮬러의 통계를 빌려 전쟁이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었음을 입증한다. 20세기 전반기에 비해 후반기 전쟁 사망률은 급격히 감소했으며, 민주주의 확산은 지도자가 시민의 생명을 함부로 소모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억제력이 되었다. 호건은 인류가 자신의 본성을 재설계할 수 있는 유일한 종임을 상기시킨다. 전쟁이 필연적이라는 믿음은 그 자체로 전쟁을 지속하는 엔진이 되는 반면, 전쟁이 문화적 발명품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책임의 주체가 된다.
우리가 "전쟁을 끝낼 수 있다"라고 믿을 때, 비로소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제도와 법적 장치들이 힘을 얻기 시작한다. 집단 갈등을 살육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낡은 아이디어'임을 선언하는 순간, 전쟁의 종언은 현실이 된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초월적인 기술이나 유전공학이 아니라, 전쟁을 제도적으로 거부하는 집단 의지다.
3차 세계대전이 입에 오르내리는 암울한 현실에서 저자의 낙관론이 모든 학자를 설득한 것은 아니다. 많은 전쟁사 연구자들은 수렵채집 사회에서도 집단 간 치명적 폭력이 빈번했으며, 전쟁은 농경 이후의 발명품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오랜 동반자였다고 본다. 전쟁의 기원을 둘러싼 학계의 합의는 아직 미완이다. 물론 이러한 반박이 전쟁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전쟁이 오랜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왔다는 사실과, 앞으로도 전쟁을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설령 전쟁이 인간 조건의 일부였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조건을 제도적으로 통제해 온 존재다. 호건의 책은 인간이 스스로를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웅변한다. 낙관은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기 위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인류가 노예제와 인간 제물 풍습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냈듯이, 전쟁 또한 우리의 이성과 공감 능력을 벼려내어 종식할 수 있지 않을까. 먼 훗날 후손들은 조상의 역사를 혀를 차며 슬픈 눈으로 바라볼지 모른다. 대체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죽음을 거쳐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