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 《사서》(1566)
혹시 여러분은 고전이라는 두 글자에 벌써부터 거부감이 스멀스멀 올라오시나요? 고전의 한자 뜻풀이를 그대로 설명하자면 옛 고(古) 자에 법 전(典) 자가 합쳐진, '오래된 규범과 모범을 지닌 서적'을 의미합니다. 서구권에서는 라틴어 classicus(최상급)가 그 유래입니다. 보통 가장 가치 있고 위대한 책을 뜻하는 용어로 통용됩니다. 동서구의 정의를 합쳐 고전을 정의하자면 시간을 넘어 오래도록 보편타당하게 인간과 세계를 규명하는, 가치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뭣도 모르던 중학생 시절부터 고전을 읽어왔습니다. 고백하노라면 허영심이 가장 중요한 독서의 동인이었습니다. 플라톤이니 공자니 낯선 이름의 저자가 쓴 책들의 아우라가 전해주는 묘한 거리감이 참 매력적이었거든요. 괜스레 친구들 눈에 잘 보이게끔 책상 위에 슬며시 올려놓아 짐짓 뽐내기도 했었죠. 물론 그런 책들을 읽는다고 멋있어지거나 대단해지는 게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습니다. 중2병의 세월이 지나고 대입, 사회 경험을 거치며 내가 별 것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고, 독서와 지식의 추상적 성질에 대해서도 많은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가서 책 깨나 읽은 사람이라고 어깨에 힘주는 일은 없어졌죠.
근데 이 책을 읽은 일만큼은 자랑 좀 하고 싶어 집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한테 제발 좀 읽으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징징거리며 강제하고픈 욕구마저 들 정도죠. 핵이빨로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까지 평했습니다. "그가 글을 씀으로써 이 지상에 사는 기쁨이 늘어났다". 대체 무슨 책이길래 이렇게 서두가 기냐고요? 바로 미셸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의 《에세》(수상록)입니다.
민음사판으로는 무려 3권으로 나뉘어 발간되었더군요
동서문화사 판으로는 한 권으로 나와 있습니다
원래는 동서문화사에서 번역 출간한 《몽테뉴 수상록》으로 읽었습니다만, 민음사에서 재작년에 새롭게 번역 출간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아 잽싸게 구매했습니다. 이미 읽은 책을 왜 구태여 다시 샀냐고 묻는 분들도 있을 법합니다. 제 대답은 간명합니다. 그야 '최고의 책'이니까요. 말로만 최고의 책이라고 칭찬하기보단 더 상세한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일단 책을 소개하기 전에 그의 삶부터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몽테뉴는 1533년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 성에서 태어났습니다. 법관의 길을 걷다가 37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퇴직을 하는데요. (파이어족의 시조인가?) 그 이후에는 아버지가 물려준 성에 기거하면서 탑 건물 전체를 서재로 꾸미고 1,000권이 넘는 책을 채워 넣습니다. 그 이후 수십 년 간을 오롯이 자아의 이야기를 성찰하는데 바쳤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위의 책 《에세》입니다.
에세(Le Essais)는 프랑스어로 <시도>라는 뜻인데요. 몽테뉴는 한 마디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글의 장르를 시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전 작가와 달리 성경이나 고대 신화 속 위인의 영웅적 행보를 탐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윗이나 솔로몬, 아이네이아스를 탐색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자아에 뜯어보았습니다. 장중한 신화보다 내면의 드라마에 집중했지요. 그 노력이 헛되지 않게, 바로 이 책에서 근대적 '에세이'라는 장르가 탄생했습니다. 일정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의 체험과 느낌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글들은 모두 그의 은덕을 입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가 얼마나 솔직 담백한 인간이었는지는 서문만 읽어도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라이머 (Georg Friedrich Reimer, 1828~1866), 《계몽주의 시대 도서관에 있는 사서》(1850)
"나는 사람들이 여기서 꾸밈없이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보통 때의 내 모습을 봐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그려 보이는 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공공에 대한 예의가 내게 허락했던 한에서, 내 결점이며 생긴 그대로의 내 모양이 여기서 읽힐 것이다. (...) 그러니 독자여, 나 자신이 내 책의 재료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경박하고 헛된 주제에 그대의 한가한 시간을 쓰는 것은 당치 않다. 그러면 안녕."
이 얼마나 꾸밈없는 고백인가요? 서문에서부터 내 글은 허섭스레기니 읽는 일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못 박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요? 많은 작가들이 쓴 서문을 보면 자신의 책에 어마어마한 뭔가가 담겨 있다고 뽐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독자가 책장을 더 넘기게끔 유혹하기 위한 수작이죠. 근데 오히려 몽테뉴는 '내 글 별 의미 없으니까 책 덮어도 좋아'라고 무심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웬걸, 이런 가감 없는 태도가 오히려 책을 손에서 뗄 수 없게 만들죠.
기대감을 그대로 유지해도 좋습니다. 페이지 수가 늘어날수록 더욱 재미있으니까요. 몽테뉴는 오랜 독서에서 얻은 지식과 고전의 일화들을 지혜로운 잠언으로 우리에게 전수해 줍니다. 그의 글은 냉철하지만 동시에 묘한 따뜻함도 있어, 독자들에게 편안함을 선사합니다. 그의 문장은 가장 한가한 시간에 읽고 싶게끔 저를 유혹합니다. 고단한 하루가 끝나가는 늦은 오후 황혼이 질 무렵, 얕은 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앉아서 잔잔하게 페이지를 넘기고픈 글이죠. 또 매 문장마다 밑줄을 긋고 싶은 통찰로 그득합니다. (스포는 싫으니 긴 인용은 생략하겠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묻습니다. Que sçay-je?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뜻입니다. 그는 오연한 태도로 세사에 통달한 척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인물이었던 이유가 바로 스스로의 무지를 알았던 덕분이듯, 몽테뉴도 자신의 무지를 통해 오히려 현인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네 삶에서 얼마나 사람들은 말이 많은가요. 뭘 많이 안다 뽐내려고 입을 쉬지 않고 놀리고, 남이 말할 틈새도 주지 않지요. 몽테뉴였다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겠지요. "자네, 그래서 정말 아는 게 뭔가?"
몽테뉴 동상 - 출처: Wikimedia
몽테뉴가 눈을 감은 때는 1592년이었습니다. 지구 반대편 조선 땅에선 한창 일본군이 국토를 폐허로 만들던 중이었죠. 몽테뉴의 글에서 느껴지는 모더니티(modernity)에 감탄하노라면, 충무공과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 쓴 글이라는 사실에 더욱 아연하게 됩니다. 그 옛날에 이토록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어투로 글을 쓰다니요! 당시 몽테뉴의 고국이었던 프랑스도 구교-신교 싸움에 바람 잘 날 없이 피가 넘치던 시산혈해의 아사리판이었음을 염두할 때, 그의 내밀한 고백이 더욱 뜻깊게 다가옵니다. (그가 책을 집필하던 중에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도 일어났었죠) 야만의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 꼿꼿하게 자신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간 그의 위대함이 더욱 돋보입니다. 잡설이 길었습니다. 사실 저는 밑의 찬송을 위한 수단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안톤 라파엘 멩스(Anton Raphael Mengs, 1728~1779), 《아폴로, 므네모시네, 아홉 명의 무사이》(1761)
오오, 현인 몽테뉴여. 당신의 글에서 나는 인간을 배우게 되었고, 어렴풋하게나마 인간의 길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의 거미줄을 헤치고 마음을 다잡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건 그대의 글이 선사한 기쁨 덕입니다. 호메로스가 무사이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듯, 저도 당신께 서원을 올리며 그대의 영전에 비루한 이 짧은 글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