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함을 거부하라!

우리에게 남겨진 책무: 잔혹함에 저항하기

by 탱귤도령

잔인한 세상


vintage-historic-photos-of-the-battle-of-berlin-1945-bw-01.jpg 베를린, 1945년


역사책을 읽노라면 사람이 냉소적으로 변하게 된다. 무미건조한 어투로 인간의 잔혹함과 어리석음의 퍼레이드를 나열한 문장들을 톺아보면, 현실 세계가 얼마나 절망적이고 무의미한 고통과 괴로움이 점철된 폐허인지 실감하고 몸을 떨게 된다.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antony beevor)의 《제2차 세계대전(The Second World war)》을 펼쳐본 기억이 난다. 하나의 단락이 줄 바꿈 될 때마다 최소 수만 명의 목숨이 증발한다. 독일-소련 전선의 몇 주 사이에 군인 수만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수십만 명이 몰살된다.


흰 종이 위의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그 뒤에는 각자 욕망과 자아, 저마다의 사연을 지녔던 개인의 비극적 종말이 도사린다. 필설 하기 어려운 이 참상을 담담한 어조로 묘사한 문장을 읽다 보면, 너무나 어이가 없어 쓴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역사책들을 장기간 읽고 나면 뉴스 헤드라인에 어떤 끔찍한 일이 보도되어도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태연자약하게 콧방귀를 뀌게 된다. 인간의 광기와 악의는 가늠할 길이 없으며, 인간본성에는 뿌리 깊은 잔학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창세기 8장 12절)이다.


고통과 잔학함을 빚어내는 주체가 단순히 인간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 세계의 모든 생명이 서로에게 괴로움과 아픔을 선사하며 신음하고 있다. 어린 시절, 길을 걷다 귀여운 참새 한 마리가 작은 벌을 잡아먹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평소에는 무해하게만 여기던 자그마한 존재가, 자기보다 약한 생명을 무참히 포식하는 광경은 역겨우면서도 기괴한 인상을 남겼다.


고통스러운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가냘픈 다리를 발작적으로 움직이던 벌의 몸짓과, 아랑곳 않고 연약한 속살을 집중적으로 파먹던 참새의 무감한 표정. 지금 이 글을 끼적이는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을 포식의 드라마! 새끼 펭귄을 갖고 놀다 날카로운 이빨로 찢어 죽이는 얼룩무늬물범의 서늘한 눈빛, 산 채로 연어의 가죽을 벗겨 먹는 야생 곰. 사냥 이후 핏빛으로 물든 사바나의 풀밭. 육식동물의 포식 활동이 그들의 본성에서 비롯한 행위며 옳고 그름을 가릴 문제가 아님을 알면서도, 자연계에 흐르는 이 가공할 고통의 총량을 마주하면 정신이 아찔해지곤 한다.


Egypt_Abou_Simbel6.jpg 히타이트 병사를 짓밟아 죽이는 람세스 2세 (카데시 전투 기록화)


이처럼 유혈이 낭자한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종족은 불필요한 고통을 대량 생산해 내는 능력을 독보적으로 발휘한다. 인간은 단순한 포식이 아니라, 순수하게 의도된 잔혹성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정말 독특한 동물 종이다. 와디 쿠바니야(19,000년 전)와 제벨 사바하 (12,000년 전)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학살되어 묻혀 있는 유해는 문명 이후에야 폭력과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던 루소의 견해를 반박하고, '고귀한 미개인'의 신화를 산산이 부쉈다. 인간은 신석기시대부터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저 옛 서사시들이 묘사하던 '순박했던 황금시대'는 존재한 적이 없다.


그 이후 역사 이래로 인간이 고안해 낸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식의 잔악 행위는 어떤가. 왕국을 위하여, 주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ism을 위하여 타인을 서슴지 않게 고문하고 목을 쳤다. 프로이트가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Narcissism of small differences)'이라 칭한 현상, 즉 아주 사소한 견해, 습관, 복식, 신앙의 차이에 집착하여 타인을 도륙하던, 탄식을 내뱉게끔 만드는 역사의 흔적들. 우리는 이 비극의 논리를 매번 되풀이해 왔다.


도덕적 원(moral circle)


par37859-teaser-story-big.jpg 꽃을 든 소녀 - 1967년, 베트남 반전 시위 중에서


그럼에도 근대 이후 인간 문명은 잔인성을 점차 억제하는 데 일정한 성공을 거둔 듯 보인다. 우리는 더 이상 국가원수를 모욕했다고 사지를 찢어 죽이지 않으며, 불필요하게 잔혹한 고문은 금지되었다. 여성이 교육을 원한다고 구타당하지 않고, 체벌은 ‘훈육’이라는 명목 아래서도 정당화되기 어려워졌다.


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말했듯이, 인류의 도덕사는 '도덕적 원(moral circle)'이 확장되는 과정이다. 원래 인간의 공감은 극히 협소했다. 가족·부족·혈족이라는 좁은 반경 안에서만 도덕적 고려가 이루어졌고, 그 너머의 존재는 윤리적 처우의 대상이 아니었다. 공리주의 철학의 창시자인 제레미 벤담이 도덕적 고려의 기준을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Do they suffer?)"라는 질문으로 재정의한 일은, 인류사에서 획기적인 도덕적 진보의 순간이었다. 그 이후 공감의 범위는 가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민족으로, 그리고 인류 전체로 꾸준히 넓어져왔다.


그래서일까? 스티븐 핑커, 매트 리들리, 마이클 셔머 같은 자칭 '과학적 계몽주의자'들은 인류의 도덕성이 결국 정의(Justice)의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며 낙관적 전망을 내놓는다. 하지만 이런 진보 서사는 현실의 벽과 마주하면 한순간에 무너진다. 지금 팔레스타인에선 어린아이 3만 명이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학살되었고, 수단에서는 인종청소가 일어나고, 우크라이나 참호에선 젊은 병사들이 진흙탕 속에서 마지막 숨을 들이쉰다. 도덕적 원은 확장되었지만, 수많은 존재들이 여전히 그 바깥에서 신음한다.


육식 산업: 우리가 외면해 온 현대 문명의 지하실


51zVUpvjBaL._AC_UF894,1000_QL80_.jpg 다큐멘터리 지구생명체(2005)


사실 인간의 잔악성은 같은 인간 종에게 행하는 일에만 그치지 않는다. 가장 끔찍한 잔혹성은 오늘날 인간이 비인간동물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중 단연 최악은 전지구적인 육식 산업이다. 공장식 육식 산업은 인류 문명이 낳은 잔혹성의 극치이며, 잔인함의 규모는 지구 역사상 전례가 없다.


육계(肉鷄)는 태어난 지 몇 주만에 성체 덩치를 얻도록 강제 번식되며, 자신의 체중을 견디지 못해 다리가 부러진 채 바닥에 깔려 죽는다. 소는 몸보다 약간 큰 강철 우리 속에 평생 몸뚱어리 하나 돌릴 수 없는 '임신틀'에 갇혀 출산기계로 전락한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강제로 떨어진다. 돼지는 지능이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강아지보다 높은 사회성 동물이지만, 그저 육질이 중요한 고깃덩이로 취급받는다. 자연 상태에서 평균 수명이 20년인 소는 1~2년 만에, 15년인 돼지는 6개월 만에, 10년인 닭은 40일 만에 도살된다.


전 세계적으로 연간 약 800억 명 이상의 육상 동물이 인간의 미식을 위해 도살된다. 여기에 연간 약 1~3조 명이 넘게 소비되는 해양 생명까지 포함하면, 초당 약 3만 5천에서 10만 명의 생명이 인간의 식욕을 위해 사라진다.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능가하는 학살기계를 24시간 매일 풀가동하고 있다. 만약 '잔혹함 경진대회'가 개최된다면, 공장식 육식 산업은 자랑스레(?) 금메달을 목에 걸 것이다. 이는 인류 문명이 고안해 낸 가장 거대한 규모의 고통 생산 장치다.


객관적 도덕률은 존재하는가


dyingsoldierpriest.jpg 신부의 도움(Aid from the Padre)


윤리(Ethics)라는 철학 분과가 확립된 이래로, 도덕률의 근거를 묻는 질문은 꾸준히 이어져왔다. 근대 이전에는 객관적 도덕법칙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상가들이 주류를 이뤘으나, 근대 이후는 도덕, 가치, 윤리는 인간의 진화적 역사적 과정에서 협력과 공생을 위해 발명된 장치라는 견해가 우세해졌다. 그러나 도덕의 토대가 객관적인지, 상대적인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미답의 영역이다.


나는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견해를 지지한다.《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그는 우리가 믿는 도덕은 실제로 지탱하는 바닥 없이 대기 중에 떠 있는 구조물과 같다고 말한다. 우리의 가치는 우연히 주어진 것이며 필연적인, 결정론적 법칙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로티가 남긴 중요한 통찰이 있다. 비록 보편적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합의할 최소한의 윤리적 규칙은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단 한 가지 합의할 수 있는 것은, 잔인함이 악(惡)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자유주의자란 '잔인함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자유주의적 공동체의 이상은 잔인함을 경감하고 연대(Solidarity)를 확장하기 위한 노력과 분투에 있다. 핵심은 "잔인함에 대한 거부"다. 도처에 널린 무자비함에 저항하는 행위. 이 행위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책무라고.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는 《품격 있는 정치를 위한 투쟁》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리버럴'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하나의 완결된 이데올로기라기보다, 다양한 신념을 아우르는 도덕적 감수성을 의미한다. 왈저가 묘사하는 자유주의적 도덕성(liberal morality)의 핵심 역시 잔혹함과 가혹함에 대한 거부다. 리버럴은 특정한 주의(主義)가 아니다. 그것은 잔인성에 맞서는 명백한 거부의 몸짓이다.


로티와 왈저는 서로 다른 철학적 전통에 몸 담고 있음에도 각자의 학문적 여정에서 공통된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에겐 잔인성을 악(惡)으로 규정하고 이를 몰아내기 위해 함께 연대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도덕의 기초가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오히려 잔인함의 금지라는 최소한의 윤리가 공동체를 지탱하는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옛 조상들처럼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며 인간의 길을 읽거나, 칸트가 말한 도덕률을 암송하지도 않지만, 곳곳에 산재한 잔인함에 미약하나마 저항해야 하는 의무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직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폭력과 혐오, 배제, 낙인, 은밀한 잔인함의 구조가 촘촘히 숨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유물을 파헤치는 고고학자의 작업과도 같다. 일상성의 지층 아래 숨겨진 잔학함을 샅샅이 찾아내어 제거해야 한다.


도덕적 의무는 절대적인 신이나 우주의 법칙이 강제하는 명령에 근거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윤리는 우리가 모두 같은 행성에 발 딛고 살아가며, 바다와 하늘과 드넓은 대지를 공유하며,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우리와 공존하는 모든 존재에게 사려 깊은 대우를 해야 한다. 그들이 자유롭게 역량을 발휘하며 살 수 있도록 돕고, 동료로서 인정해야 한다.


서로에게 잔악해지지 말 것. 남아 있는 잔인함에 저항할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거대서사가 증발한 세상, 신앙이 죽은 세계,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등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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