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하라는 말

지겨운 사상검증 언제까지 하려나

by 탱귤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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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께서는 분주하시었다. 전 세계 악의 축들을 때려잡으시느라 밤잠을 설치시는 세계의 경찰청장. 이번 금쪽이는 베네수엘라였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 폭탄을 떨구고 델타포스를 투입해 마두로를 압송해 오는 희대의 작전을 펼쳤다. 나는 뉴스를 보고 경악했다. 저렇게 쉽게 일국의 수장이 납치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더 놀라운 점은 한국의 인터넷 여론이었다. 가장 친한 동맹국과 영미권 언론들에서도 불법적인 침공이며 국제법을 아주 제대로 위반했다고 앞다퉈 비난 성명을 내고 법리적인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큼은 '마두로가 설쳤지' '힘이 곧 정의다' 라며 미국의 행동을 용인하는 뉘앙스의 여론이 조성되고 있었다.


스크린샷 2026-01-08 101807.png 어느 인터넷 여론


그래 마두로가 천하의 나쁜 놈이며 질 나쁜 독재자인 걸 누가 모를까. 반정부 시위를 유혈진압해서 수백 명을 죽였다. 반정부 인사들을 야밤에 납치하여 감금했다. 반대파를 고문하고 성폭력을 행사했다.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 빈곤과 억압에 지친 베네수엘라 인구의 30%가 해외로 탈출하게끔 만들었다. 전쟁 지역을 제외하고 세계 최대 규모의 이주 위기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뭐 더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짚고 넘어가겠다.



202424JeromeRoos.jpg 이미지 출처 - New Statesman


그러나 침공은 침공이다. 엄연한 주권 국가에 미사일을 날리고 베네수엘라 민중의 동의나 의견도 수렴하지 않고 군사적 수단으로 영토를 침범해서 대통령을 납치해 오는 걸 용인하면 그다음에는 어떤 일이 허용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많은 국가들이 미국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였던 것은 규칙 기반 질서 The 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가 삐걱거리더라도 작동을 했으며, 미국이 상징적이나마 질서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미국이 여기저기서 깡패라는 힐난을 듣더라도 많은 동맹국은 미국을 비호했다. 그런데 이게 뭐람. 이젠 고상한 척도 하지 않는다. 트럼프 측근 중 한 명은 노골적으로 말한다. "미국과 전쟁할 나라 어디 있나? 힘이 곧 법이다." (농담 아니라 진짜 발언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 보았더니 곧바로 반격이 돌아왔다. 네가 지금 미국을 비판하는 것은 좌파 마두로 지지자여서 그런 게 아니냐는 반문.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려면 네가 마두로 지지자가 아님을 입증하는 증거를 갖고 오라고 했다. 말문이 막혔다. 아니 이제 특정 사안을 비판하려면 신앙 고백과 간증의 절차부터 밟고 비판을 해야 하나?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다 머리가 지끈거려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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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보았던 TV 토론의 한 장면이 필름롤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어느 유명 변호사가 통합진보당 종북 논란 관련된 토론 진행 중 돌발 발언을 펼쳤다. '김일성 김정일 개새끼'라는 말을 못 하면 종북 세력이다. 지금 반대 토론자인 너의 입장도 밝혀라 요런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침 튀기며 강변하시는 분이 타인의 사상 검증부터 먼저 진행하겠다면서, 본인이 뱉은 말의 논리적 모순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모습이 웃겨서 한참 깔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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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에 김수영 시인은 이렇게 일갈했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발화를 하고, 토론장에 나오기 위해서는 주류 담론과 현재 체제에 대한 신앙 고백과 간증, 충성부터 크게 외치고 오라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생각. 스스로의 언어를 성찰할 의지도, 반성적 의식도 부재한 저 꽉 막힌 사람들. 그런 이들이 광복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해 왔다는 사실 자체가 오늘 우리의 비루한 현실을 낳은 모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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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소설가의 중편소설 <소문의 벽> 한 대목이 떠오른다. 한국전쟁 발발 후 어느 야밤, 경찰인지 공비인지 알 수 없는 무리가 마을에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눈이 부시도록 밝은 전짓불을 얼굴에다 내리비추며 묻는다 '너는 누구의 편이냐?' 갑작스레 찾아온 이방인의 질문에 아이를 껴안고 있는 어머니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다. 전짓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경찰인지 공비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목숨을 잃게 된다. 어느 편인지 따져 묻는 그 물음. 어머니의 입장은 절망적이다.


비슷한 공포스러운 협박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편재했었나. 그 폭력의 물음은 지금도 여전히 유령처럼 떠돌며 첨예한 갈등의 상황마다 재소환된다. 네가 좌파 빨갱이가, 페미니스트가, 조선족이, 중국인이, 영포티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라! 정말 지겹고 열받는다.


스크린샷 2026-01-08 102253.png 이미지 출처 - 폴리티코


좋은 침공이 있고, 나쁜 침공이 있나? 침공은 침공일뿐이다. 내가 무슨 홍길동인가? 침공을 침공이라 부르지 못하고...... 작금의 국제질서를 요약하자면 강대국들끼리의 제국주의식 땅따먹기다. 세계가 다시 광기의 아사리판이 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유명한 문구가 나온다.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으로는 어릿광대극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


19세기 제국주의 분할이 때 아닌 21세기에 우스꽝스럽고 천박한 지도자들에 의해 어이없게 반복되고 있다. (물론 희생되는 사람들에겐 笑劇이 아닐 것이다) 지금 미국의 정책도 그 일환일 뿐이다. 미국이 감행한다고 해서 전쟁이 갑자기 정의로운 전쟁이 될 수는 없다. 수천 년 전 붓다께서는 말씀하셨다. 여실지견(如實智見),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이다.


자, 벌어진 현실을 그대로 보아라. 침략은 침략이다. 빨갱이라고 욕해도 상관없다. 네가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하라고 뻗대는 이들의 말에 굴복할 마음이 없다. 미국을 규탄한다. 러시아를 규탄한다. 중국을 규탄한다. 이스라엘을 규탄한다. 이란을 규탄한다. 인간을 억압하고 민중을 멋대로 조종하는 모든 권력을 규탄한다. 남의 말문을 손쉽게 막으려는 권력에 찌든 인간들을 규탄한다. 'Fuc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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