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육아라는 정답(?)에 대하여

강아지와 산책을 하며 생각한다

by 탱귤도령




푸른 팔걸이의자에 앉은 소녀(Petite fille dans un fauteuil bleu) - 메리 카사트(Mary Cassatt),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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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내가 가장 애착하는 일과는 여자친구와 강아지 오OO씨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하는 일이다. (본명은 비밀이다) 걷고, 멈추고, 한가롭게 풀내음을 맡는다. 우리는 그가 용변을 끝마칠 때까지 옆에서 기다린다. 주섬주섬 배변봉투를 펼치고 응가를 담는다. 별다를 것 없이 순탄하던 산책의 어느 날, 길가에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우리를 보며 말을 건넸다. 요지는 단순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애는 안 낳고 개만 키워~! 이래서야 되겠어?" 꾸지람이라기보다는 툭 던진 불평에 가까웠다. 여자친구와 나 역시 크게 대꾸하지 않은 채 웃으며 지나쳤다. 그리곤 기억 저편으로 잊어버리고 일상을 보냈다.


며칠 전 습관처럼 인터넷 커뮤니티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결혼과 출산을 다룬 글 하나를 보게 되었다. 인간은 결국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다 죽는 삶을 사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행복한 정답지라는 내용이었다. 전혀 새롭지 않고 일견 진부하기까지 한 말이었지만 반응이 유난히 폭발적이었고, 공감의 댓글들이 줄지어 달려 있었다. 그날따라 출생률이 낮아진다며 우려하는 뉴스 헤드라인도 연달아 눈에 들어왔다. 산책길에서 들은 한마디, 인터넷의 글과 댓글, 뉴스의 통계가 묘하게 이어지며 하나의 조용한 소음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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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결혼–출산–육아–죽음. 이 단순한 사이클은 수십만 년 동안 반복되어 온 인간 삶의 기본 패턴이다. 정말이지 오래 지속된 탓에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얼마 전 유튜브 숏츠에서 보게 된 어느 외국 패널들의 대담에서 비슷한 화제가 오갔다. 결혼과 육아를 부담스러워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사회자의 질문에, 한 패널은 얼굴을 찌푸리며 “That’s a stupid question”이라고 잘라 말했다.


결혼과 육아를 하지 않으면 도대체 인생에서 무엇을 할 것이냐, 인간은 책임을 떠안아야 비로소 삶다운 삶을 살아내게 된다고 성을 내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우스꽝스럽게 부아를 낼 일인가 하여 크게 웃었다. 물론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저리 성을 냈는지는 미약하게는 이해했다. 의미는 진공에서 생기지 않으며, 부담과 책임을 껴안지 않으면 인간은 공허에 직면한다는 뜻이었겠지. 아마도?


자유롭게 살아라, 자기 자신을 실현하라, 하고 싶은 걸 하라는 말들은 한때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말들은 해방의 언어가 아니라 무거운 짐처럼 느껴진다. 선택지는 많아졌지만, 그만큼 감당해야 할 불안도 늘어났다. 욕망은 소진되고, 가능성은 나이가 들수록 하나둘 닫힌다. 세계는 여전히 견고하고 냉정하다. 자유는 축복이라기보다 부담스러운 짐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하고 애 키우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은 다시 오래된 삶의 패턴으로 회귀하여 그곳에 기대어 존재를 위안한다. 이건 신념의 승리가 아닌 피로 이후의 한숨 섞인 선택에 가까워 보인다. 호수 바닥에 돌덩이가 가라앉듯이 무겁게 내려앉은 체념을 머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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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흐름을 아예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가족을 선택하는 이유는 결국 의미를 갈구하는 인간의 필사적 몸짓일지 모르겠다. 책임을 받아들이고, 누군가를 돌보며, 삶에 목적을 부여하는 방식은 분명 오랫동안 효과가 있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작동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는 작은 질문이 남는다. 모든 사람이 과연 동일한 방식으로만 공허를 메울 수 있을까. 충만함과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정말 하나뿐일까.


책임과 목적을 통해 의미를 빚어내는 방법이 반드시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누군가는 가족 안에서, 누군가는 일과 직업적 소명, 혹은 다른 방식의 돌봄 속에서 삶을 버텨낸다. 경로가 다를 뿐, 의미를 손에 쥐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어쩌면 진짜 질문은 정답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의미를 어디서 길어올리는가' 일지 모른다. 물론 이 결론 역시 시간이 지나면 바뀔 수도 있겠지. 다만 지금의 나는 이렇게 느끼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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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니야. 무슨 뜻이냐 하면 생명을 만들어내는 일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 어떤지, 그걸 잘 모르겠다는 거야. 아이들이 성장하고, 세대가 교체되고,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지? 산을 더 허물어서 바다를 메우고, 더 빨리 달리는 차가 발명되고 더 많은 고양이가 치어 죽어."


하루키 소설 속 한 문장이다. 요즘은 정답을 정하고 그것을 서로에게 강요하며 성내기보다는, 우리가 함께 삶을 살아가며 각자의 무늬를 수놓고 있는 공동체를 다시 사유하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자문하곤 한다.


어떤 삶은 옳고, 어떤 삶은 틀렸다고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기보다는, 의미에 이르는 다양한 경로가 있다는 사실을 용인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각자의 삶을 살아내는 길의 형태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의 빈 공터가, 지금보다 조금 더 넓어지기를.


나는 다시 오늘의 산책길로 돌아온다. 옆에서 천천히 걷다, 강아지씨가 멈추면 잠시 서서 기다린다. 반질거리는 검은색 털 갈기를 한 번 더 쓰다듬는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되뇌면서. 공기가 따뜻하다. 친애하는 강아지씨의 눈동자가 햇빛을 머금고 조용히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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