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직관을 거스르는 결정론의 과학

by 탱귤도령


Dorothy Lathrop - Down-Adown-Derry (1922)


오늘 아침 마신 커피는 정말 ‘당신의 선택’이었을까?


오늘 아침의 풍경을 잠시 떠올려보자. 지겨운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조금 더 자고 싶은 유혹을 뿌리친 채 침대에서 일어난다. 주방으로 가 커피를 마실지 차를 마실지 잠시 고민하다가 커피를 손수 내려 마신다. 이 사소한 짧은 순간,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선택했다'는 강렬한 감각을 경험한다.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느낌, 내 의지에 따라 나를 움직인다는 믿음.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자연스레 여기는 '자유의지'다.


하지만 스탠퍼드 대학교의 저명한 신경과학자인 로버트 새폴스키(Robert Sapolsky)는 기념비적 저작『결정되어 있다: 자유의지 없는 삶의 과학(Determined: A Scinence of Life Without Free Will)』를 통해 이 익숙한 감각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생물학적 착각인지를 폭로한다. 우리 시대 최고의 과학 저술가로 평가받는 새폴스키는 과학자다운 집요함을 발휘해 우리가 '자유'라 믿었던 영역이 사실 촘촘한 인과관계의 사슬로 묶여 있음을 논증한다. 이 책은 단순히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우리가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과 사회 시스템의 근간을 완전히 뒤바꾸라고 촉구한다.


무한하게 이어지는 거북이들


Maurits Cornelis Escher - Ascending and Descending (1960)


새폴스키는 이 파격적인 논증의 문을 ‘거북이’ 일화로 열어젖힌다. 지구가 거대한 거북이 등 위에 있다고 믿는 노부인에게 한 학자가 묻는다. "그 거북이는 무엇 위에 서 있나요?" 부인의 대답은 명확하다. "또 다른 거북이 위에 있죠." 학자가 다시 묻는다. "그럼 그 아래는요?" 그러자 부인이 소리친다. "거기서부터 쭉 거북이뿐이랍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행동의 원인을 찾을 때, 그 직전의 '의도'에서 멈추게 된다. "내가 하고 싶어서 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새폴스키는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모종의 의도(거북이) 아래에는 반드시 그 의도를 만든 이전의 원인(또 다른 거북이)이 있다고 말한다. 새폴스키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공중에 떠 있는 거북이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북이뿐이다." 즉,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결정론의 입장에서는 무한한 거북이의 비유가 정확한 현실을 반영한다. (잘했어요 부인!)


저자는 한 졸업식 풍경을 예로 든다. 한쪽에는 빛나는 졸업 가운을 입고 박수를 받는 명문대 졸업생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행사가 끝난 뒤 묵묵히 쓰레기를 치우는 미화원이 있다. 우리는 흔히 학생의 성취를 '노력'의 성과라 칭송하고, 미화원의 삶을 그가 내린 '선택'의 결과라 치부하곤 한다. 여기서 새폴스키는 우리에게 난감한 질문을 던진다.


"만약 두 사람의 유전적 조건, 태아 시절의 영양 상태, 유년기 부모의 양육 방식, 자라난 환경의 문화적 배경을 통째로 맞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결론은 명확하다. 쓰레기를 치우는 미화원이 졸업 가운을 입게 되고, 졸업생이 쓰레기통을 비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결정론이 말하는 우리 삶의 냉혹한, 그러나 정직한 진실이다.



1초 전부터 태초까지



Maurits Cornelis Escher - Hand with Reflecting Sphere (1935)


이 책의 백미는 우리의 행동이 결정되는 과정을 시간의 역순으로 추적하는 대목이다. 새폴스키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1초 전부터 추적을 시작해 시간의 거북이 탑을 쌓는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화를 내기 1초 전, 우리 뇌의 신경세포에서는 전기 신호가 맹렬히 오간다. 공포를 담당하는 편도체와 이성을 담당하는 전두엽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 교전의 승패는 몇 분 전 우리가 본 영상, 혹은 몇 시간 전 우리가 느낀 허기에 의해 결정된다. 실제로 배가 고픈 판사가 가석방 승인율을 현저히 낮게 책정한다는 연구 결과는, 우리가 신줏단지처럼 아끼는 '이성적 판단'이 얼마나 무작위적인 신체적 상태에 휘둘리는지를 보여주는 서글픈 증거다.


연쇄의 사슬은 더 깊게 먼 과거로까지 뻗어나간다. 며칠 전 나의 혈액 속을 떠돌던 호르몬 수치는 뇌가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민감도를 조절했다. 청소년기와 유년 시절 환경은 전두엽의 물리적인 성숙도를 결정짓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태아 시절 어머니가 겪은 스트레스와 영양 상태, 그리고 내가 물려받은 유전자가 등장한다. 슬슬 숨이 차는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수백 년에서 수천 년 전 형성된 문화와 가치관은 세대를 거쳐 뇌 회로에 각인된다. 이 모든 과정 중 당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유전자를 우리가 골랐나? 우리를 길러줄 부모를 선택했나? 태중에 있을 때 노출된 호르몬 농도를 조절했는가? 모두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면, 그 모든 과정을 거쳐 형성된 현재의 '나'와 나의 '의도' 역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연쇄 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이처럼 "1초 전-1분 전-1시간 전-하루 전-사춘기-어린 시절-태중-유전자-진화-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모든 단계가 누적된 사슬로 연결되어, 모든 의도가 선행 원인의 종합된 결과로 나타난다. 저자는 도발적으로 묻는다. 자유의지를 지키고 싶다면 모든 원인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나타난 마법 같은 사건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런 기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맹목적 인과의 연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이다.


'노력'조차 자유롭지 않다: 능력주의 신화에 가하는 어퍼컷


Gustave Courbet - The Stone Breakers (1849)


많은 사람들이 반문한다. "그래요. 당신 말이 옳다고 해봐요. 하지만 아무리 조건이 나빠도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지 않나요?" 새폴스키는 이 지점에서 가장 날 선 비판을 들고 온다. '노력하는 능력'조차 생물학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수학 방정식을 외우지 못해 회초리를 맞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어떤 아이는 유혹을 참아내고 공부에 집중하는 반면, 누군가는 방정식 하나 못 외울 정도로 주의가 산만하다. 우리는 전자를 기특해하고 후자를 못마땅해한다. 하지만 뇌과학적으로 보면 전자의 전두엽이 후자보다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어졌을' 뿐이다. 고통을 견디는 인내심,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회복탄력성, 심지어 성실함조차 유전과 환경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이런,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담임선생님한테 논리적으로 따지고픈 욕구가 치민다)


새폴스키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자제력(Willpower)'이라는 단어 대신 '전두엽의 효율성'이라는 용어를 쓰자고 유머러스하게 제안한다. 누군가가 남들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룬 것은 그가 더 위대한 영혼을 지녀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생물학적 기계가 우연히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원활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를 전적으로 통제 가능하다'는 환상은 때로 잔혹한 결과를 낳는데, 다른 사람의 실패나 나 자신의 실패에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를 내리게끔 유도한다. 이는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인 '능력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통찰이다.


과학은 자유의지를 구원할 수 있는가?


Francisco de Goya - The Fates (1819-1823)


새폴스키는 자유의지를 지키려는 이들이 마지막 보루로 삼는 현대 과학의 세 가지 성역—카오스 이론, 창발성, 양자역학—을 조목조목 격파한다.


먼저 카오스 이론이다. 세상이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하니 결정론이 틀렸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새폴스키는 '예측 불가능성'이 곧 '자유'는 아님을 명확히 한다. 내일 날씨를 맞히기 어렵다고 해서 구름과 바람이 물리 법칙을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복잡성 아래에는 여전히 단단한 물리 법칙이 군림한다. 현실은 결정론적 법칙에 의해 통제된다.


둘째는 창발성이다. 하위 요소의 단순 결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능력이 발생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새폴스키는 아무리 새로운 시스템이라도 결국 이를 구성하는 입자의 물리 성질을 뛰어넘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물 분자가 모여 '젖음'이라는 성질을 만든다고 해서, 물 분자가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다.


셋째는 양자역학이다. 미시 세계의 무작위성을 근거로 인과의 사슬을 끊으려는 시도다. 하지만 소립자가 무작위로 움직인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자유로운 의도'가 될 수 있는가? 만약 뇌 세포가 무작위성에 따라 움직인다면, 우리는 일관된 행동을 하는 대신 그저 예측 불가능한 경련을 일으킬 뿐이다. 새폴스키는 '무작위성'이 결코 '자유'의 동의어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자유의지를 무작위적 메커니즘으로 정의하는 순간 의미와 책임있는 선택은 증발하고 어수선한 혼돈만이 남게 된다.


고장 난 자동차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Vincent van Gogh - Prisoners' Round (1890)


자유의지가 없다는 주장이 가장 큰 저항에 부딪히는 지점은 바로 '사법 체계'다. 만약 살인범이 자신의 유전자와 환경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면, 그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새폴스키는 범죄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응보적 정의'에서 '공중보건적 격리' 모델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사람들을 치고 다닌다면, 우리는 그 자동차가 '사악하다'라고 비난하며 망치로 때려 부수지 않는다. 대신 그 차를 도로에서 끌어내고, 왜 고장 났는지 원인을 파악하여 다음 사고를 예방하려 머리를 맞댄다.


범죄는 개인의 사악함이 아니라, 유전자와 환경이라는 부품이 불운하게 조립된 결과다. 따라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격리'는 필요할지언정, 고통을 줌으로써 범죄자에게 복수하는 '처벌'은 비합리적이다. 범죄자를 사회의 안전을 위해 격리하되, 그는 자율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니라 통제 불가했을 뿐이므로, 그를 증오로 다루지 않고 가능하면 재활의 기회도 줘야 한다. 과거에 간질 환자들은 '악마가 들렸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 이제 우리는 간질이 뇌의 전기적 문제임을 알기에 누구도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인류는 현재 우리가 '범죄'나 '나태'라고 부르는 것들 역시 생물학의 기능 장애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유의지가 사라진 자리에 피어나는 연민


이 책은 자칫 허무주의로 흐를 수 있는 결정론을 '새로운 휴머니즘'으로 승화시킨다. 우리가 누군가의 잘못을 볼 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의지가 약할까?"라고 비난하는 대신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든 인과의 사슬은 무엇일까?"라고 묻기 시작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너그러운 곳이 될 것이다. 내가 누리는 행운이 나의 노력 덕분이 아니라 '우주적 로또'에 당첨된 결과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더 겸손해지고 고통받는 존재들을 더 깊이 연민하게 된다.


우리가 기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서 마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계는 고통받고 있으며,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해질 뿐이다. "모두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카드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중"이라는 깨달음은 오만과 비난을 줄이고, 겸손과 친절을 늘릴 것이다. 오래전 쇼펜하우어가 설파했듯이 모두가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애처로운 존재들임을 알게 되었을 때 자비심이 우러나온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기나긴 여정의 마지막을 20세기 최고의 천재의 명언으로 갈음하겠다. 1929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긴 인터뷰를 진행했다. 기자는 위대한 과학자에게 직설적으로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놀라운 공로에 책임감을 느끼나요?" 아인슈타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저는 어떤 공로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도 끝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해 결정됩니다. 곤충도 별도 마찬가지이죠. 인간이든, 식물이든, 우주 먼지든, 우리 모두는 저 멀리서 신비로운 연주자가 연주하는 보이지 않는 선율에 맞춰 춤을 출 따름입니다."


Determined - Robert Sapolsky,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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