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수주의 철학을 해부하다
질문을 한 번 던져보겠다. '보수주의'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작은 정부, 균형 재정, 개인의 자유 증진, 법치 질서 옹호 같은 단어일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정의할 때 내세우는 이 가치들은 일견 근사해 보인다. 하지만 아메리칸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인 알란 J. 리히트먼은 『보수주의의 핵심: 미국 보수주의의 새로운 역사(Conservative at the Core: A New History of American Conservatism)』 에서 보수주의 철학의 중심 가치들이 위장용 수사(Rhetoric)일 뿐이라고 말한다.
리히트먼은 지난 한 세기 동안의 미국 보수주의 정치가와 지식인들의 언어를 톺아보며 결론 내린다. 보수주의자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 철학적 신념이 아니라, 특정한 이익과 권력을 수호하기 위해 동원하는 지극히 실용적이고 때로는 냉혹한 전략이다. 그는 보수주의자들이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수사와 실제 정책 집행 사이의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치며, 보수주의 원칙들이 사실은 특정 핵심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소모품이자 위장막임을 폭로한다.
리히트먼은 보수주의를 단순한 정책의 집합이 아니라, 견고한 체계를 가진 하나의 '연구 프로그램'으로 파악한다. 그는 과학철학자 임레 라카토슈의 이론을 빌려와 미국 보수주의의 구조를 설명한다. 라카토슈에 따르면 모든 연구 프로그램은 결코 변하지 않는 단단한 핵심(Hard Core)과 이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유연하게 수정, 변경, 심지어 폐기할 수 있는 보호용 외곽 벨트(Outer Belt)로 구성된다.
저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미국 보수주의를 지탱해 온 단단한 핵심은 단 두 가지뿐이라고 말한다. 첫째는 '사기업 보호'이며, 둘째는 '전통적 기독교 가치'이다. 반면, 대중에게 보수주의의 대명사로 각인된 작은 정부, 균형 재정, 주권 보호, 법과 질서, 헌법 엄격 해석, 주(州)의 권리 등은 사실 외곽 벨트에 속하는 부수적 아이디어들로, 보수정치의 핵심 이익을 위해 언제든 내버릴 수 있는 잉여물이다.
미국 보수주의의 첫 번째 핵심 기둥은 '사기업 보호'다. 리히트먼은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시장'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대중 선동에 이용했는지, 그리고 실제로는 얼마나 시장의 자유를 훼손하며 사기업의 이익을 챙겼는지 폭로한다. 그의 결론은 명확하다. 보수주의는 '자유시장'이 아니라 '사기업(Private Enterprise)' 그 자체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1920년대부터 보수주의자들은 정부 규제를 '사회주의'로 몰아세우며 대대적 홍보 캠페인을 벌였지만, 정작 집권 후에는 국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보호 관세를 도입했다. 이는 정통적인 자유시장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정책이다. 더욱이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인 특정 산업을 위해 막대한 정부 예산을 쏟아붓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화석 연료 산업에 대한 특별 세제 혜택, 대규모 농업 보조금, 금융 위기 당시의 은행 구제 금융 등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정부가 노동자를 돕는 정책을 펴면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면서, 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주는 것은 '경제 활성화'라고 열광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이중성을 꼬집는다.
보수주의의 두 번째 기둥인 '전통적 기독교 가치'는 미국을 기독교 원칙에 기반한 국가로 규정하려는 전략이다. 리히트먼은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기독교 가치가 지닌 '선택적 성격'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들은 낙태나 동성애 같은 도덕적 문제에는 성경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가부장적 권위를 존중하고 여성의 순종적 역할을 강조하며 성교육과 피임을 결사반대한다. 그러나 부의 탐욕, 정직함의 의무,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에 대한 헌신이라는 성경의 또 다른 핵심 가르침은 기업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철저히 무시한다.
리히트먼은 종교가 기업 자본주의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보조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기독교 가치는 미국 보수주의의 핵심 가치이면서도 이윤 추구의 자유와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지키기 위해, 이익 추구에 유리한 신념들만 선택적으로 채택하는 도구적 신념으로 전락했다.
'작은 정부'와 '균형 재정'이라는 원칙은 실제로는 야당일 때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일 뿐이다. 보수주의 정당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은 정부의 크기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의 목적과 운영 원리를 자신들의 핵심 가치에 맞게 재설정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보수주의 행정부는 사회 복지를 줄이고 치안 강화, 군사력 증강, 사생활 감시, 사상 통제에 집중한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의 대대적인 도청과 감시 체계, 그리고 최근 일부 주에서 벌어지는 도서 검열, 비판적 교육 금지 정책 등은 국가 권력을 이용해 특정 가치를 강요하는 '보수적 권위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재정 책임 역시 마찬가지다. 보수 정당은 야당일 때 적자 경영을 부도덕하다고 맹비난하지만, 집권 후에는 대규모 감세와 군비 증강을 동시에 추진하며 기록적인 재정 적자를 남긴다. 리히트먼은 캘빈 쿨리지 이후 모든 보수 대통령이 연방 부채를 대폭 증가시켰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균형 재정은 진보 진영을 비판하기 위해 끌어 쓰는 수사적 도구에 불과함을 낱낱이 드러낸다.
'주의 권리(States' Rights)'와 '법과 질서(Law and Order)' 역시 미국 보수주의의 주된 가치다. 주의 권리는 역사적으로 노예제 수호와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었으며, 현대에도 환경 규제 등을 회피하려 전면에 내세워진다. 그러나 보수 진영은 자신들의 의제인 낙태 금지 등을 위해서는 연방 정부가 주의 법을 압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주의 권리를 서슴없이 무시하는 행태를 보인다.
'법과 질서' 또한 선택적으로 적용된다. 보수주의자들은 반대 진영의 시위를 엄격히 진압하지만, 정작 보수 정권 내부에서 발생한 중대 범죄에 대해서는 '애국적 동기'를 내세우며 가해자들을 옹호하거나 사면한다. 리히트먼은 이를 "우리는 법 위에 있고, 반대 진영은 법 아래"에 있다고 보는 보수주의자들의 내로남불이라고 비판한다.
리히트먼은 도널드 트럼프를 보수주의의 '변종'이 아니라 지난 100년간 축적된 보수주의 전통의 '논리적 귀결'이자 '정점'이라고 결론짓는다. 트럼프야말로 미국 보수주의의 적통이다. 트럼프는 '작은 정부'나 '법치' 등의 외곽 벨트 원칙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함으로써, 오히려 핵심 가치인 '백인 위주 기독교 국가'와 '무분별한 기업 이익 옹호'를 가장 선명하게 실현했다. 보수주의는 핵심 가치의 견고함과 외곽 벨트의 유연한 폐기 전략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재생산하며 회복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트럼프는 지배 욕망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알란 J. 리히트먼의 『보수주의의 핵심』 은 우리가 보수주의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전복시킨다. 보수주의는 도덕적이고 원칙적인 이념의 집합체가 아니라, 권력과 특정 이익을 수호하려는 목적 아래 수시로 옷을 갈아입는 냉혹한 전략적 태도다. 저자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보수주의자들의 수사(말)에 현혹되지 말고 그들의 핵심 지향(행동)을 보라."
사기업의 무제한적인 힘과 종교적 근본주의의 결합이 국가의 공적 영역을 어떻게 침식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자유와 법치라는 가치가 어떻게 소모품처럼 버려지고 있는지를 리히트먼은 냉정하게 보여준다. 한국어로 번역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일독을 권한다.
추신: 이 책에서 설명한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행동 패턴이 자칭(?) 한국 보수주의자들과도 얼마나 비슷한지 짚어보는 것도 재밌는 독서법이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