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빗나가는 종말의 예언
2018년 10월, 미국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는 『사회주의의 기회비용』 이라는 묘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라는 시점과 맞물려 미국 내에서 사회주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자, 자본주의의 심장부가 당혹감 섞인 경계심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망 선고를 받아왔다. 19세기 산업혁명의 매연 속에서, 대공황의 늪에서, 그리고 2008년 금융 위기의 아수라장 속에서 당대 사상가들은 자본주의가 곧 무너질 체제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무너지기는커녕 위기를 자양분 삼아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진화하며 생존해 왔다.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라는 말이 단순한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시대다.
이탈리아 팔레르모 대학교 경제사 교수인 프란체스코 볼디조니(Francesco Boldizzoni)의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언하다: 마르크스 이후의 지적 불행(Foretelling the End of Capitalism: Intellectual Misadventures since Karl Marx)』 은 지난 200년간 자본주의의 장례식을 예언했던 사상가들의 역사를 추적하며, 왜 뛰어난 지성들이 반복해서 오답을 내놓았는지 원인을 파악하려 한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언한 사상가들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본 축적이 한계에 이르면 인류가 도덕적 진보를 이룰 유토피아에 도달할 것이라 낙관했고, 카를 마르크스는 이윤율 하락과 계급투쟁이라는 내적 모순이 노동계급의 체제 혁명을 촉발하리라 예견했다.
막스 베버는 효율성만 남은 사회 속에서 인간의 영혼이 박제될 미래를 우려했고,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너무 성공한 나머지 역동성을 상실해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2008년 금융 위기는 다시금 붕괴론을 불러들였다. 볼프강 슈트렉, 월러스틴이 자본주의의 붕괴를 점쳤고, 최근에는 토마 피케티가 세습 자본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붕괴론의 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모든 종말의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저자는 자본주의 종말론이 왜 매번 궤도를 이탈하는지 그 원인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첫째는 인지적 한계와 편향이다. 예언자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눈앞의 상황에 매몰된다. 특정 시대의 단기적 현상을 성급하게 보편 법칙으로 '과잉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여기에 '동기화된 추론(자신의 신념에 맞춰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현상)'이 가세한다. 체제 혁명이나 자유시장의 승리 같은 본인의 희망을 미래 예측에 투영하다 보니, 객관적 분석은 사라지고 소망적 사고만 남게 된다.
둘째, 문화(Culture)의 독립적 역할을 과소평가했다. 많은 이론가는 문화를 경제 시스템에 종속된 부수 요소로 보았다. 경제 구조가 바뀌면 사람들의 의식도 금방 바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문화는 경제적 조건에 단순히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문화는 수백 년간 깊이 뿌리내린 사고방식이자 생활양식 그 자체이다. 설령 위기가 닥치더라도 사람들이 경쟁과 개인주의, 소비라는 근대 이후부터 지속되어 온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체제는 무너지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단순한 생산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문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셋째, 목적론의 함정이다. 근대 사회과학은 역사가 특정한 방향이나 목적을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에 익숙하다. 사회를 기계나 유기체로 비유하는 것도 오류의 원인이다. 사회는 고장 나면 멈추는 기계가 아니며, 늙으면 죽는 생물도 아니다. 사회 시스템은 끊임없이 환경에 적응하며 변형하는 열린 과정이며, 역사는 우발적인 사건이 뒤섞여 만들어지는 예측 불가능한 흐름이다. 특정 법칙과 이론만으로 역사의 경로를 점친다면, 결과는 보기 좋게 빗나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끈질기게 살아남는 진짜 비결은 무엇인가? 저자는 자본주의가 서구 사회의 심층 구조에 자리 잡은 두 가지 기둥, 즉 위계(Hierarchy), 개인주의(Individualism) 문화와 강력하게 공명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단 위계는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지배와 종속의 구조다. 자본주의가 신분 질서를 타파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위계 구조를 자본 소유와 계약이라는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혔을 뿐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비대칭적 관계는 영주-농노 관계의 현대적 버전이다. 대중은 오랫동안 위계질서 속에서 살아왔기에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심리적 경향을 지닌다. 피지배 계급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여 자발적으로 체제에 동의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극심한 불평등이 지속되어도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는다.
또 다른 기둥인 개인주의는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여 체제를 향한 저항을 원천 봉쇄한다. 자본주의는 공동체의 유대보다는 개인의 자율성과 이익 추구를 최우선 가치로 삼으며 사람들을 개별적 원자로 만든다. 개인은 더 열심히 자기계발을 하고, 더 많은 노동을 하며, 더 위험한 투자를 시도한다. 빈곤이나 실업 같은 사회문제는 더 이상 함께 싸워야 할 공동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각자도생의 문화는 체제에 대한 집단적 저항의 싹을 자르고 자본주의의 경쟁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한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자연스럽거나 영원한 체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위계와 개인주의라는 문화적 뿌리가 워낙 깊기에 단기간의 붕괴가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시스템을 전복하자"는 뜨거운 구호는 실현 불가능한 환상을 심어주어 필요한 개혁마저 지체하게끔 만들며 냉소주의와 실망을 부추긴다.
볼디조니는 정치가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제약 속에서 가능한 최선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를 단번에 없앨 수는 없더라도, 시장의 폭주를 제어하고 불평등을 완화하며 공공 영역을 확장하는 것은 가능하다. 20세기 중반 서구 복지 국가 모델은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자본주의 체제 에서도 인간다운 삶이 가능함을 증명해 보였다. 낡지만, 이 길이 여전히 가장 유효한 해법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헛된 예언에 매달려 자본주의의 사망 진단서를 작성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대신 비정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 위에서 구체적인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유토피아적 몽상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치지 말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그렇지만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 정녕 허망한 태도일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실현하겠다는 위험한 망상만 버린다면 유토피아는 먼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 길을 잃지 않게 돕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어줄지 모른다. 저자의 주장처럼 유토피아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하는 것은 과민반응이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되 리얼리스트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 기술이 급속도로 진화하고 대규모 기술적 실업이 예견되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 노동의 가치가 제로(0)에 수렴될 것이 확실시되는 시점에 오래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모델만으로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자본주의 이후의 가능성을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헤겔의 말처럼 "지금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l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