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혐오한 사람들

3000년 문학 수난사

by 탱귤도령

문학이 삶에 무슨 보탬이 되느냐는 물음을 한 번쯤 들어본 문학도들이 있을 것이다. 막상 이런 질문을 받으면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 소개할 책을 읽고 나면, 적어도 예전보다는 조금 더 당당하게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비교문학 석좌교수 윌리엄 마르크스에게 문학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조용했던 적이 없는, 언제나 논쟁과 분쟁을 불러오는 '스캔들의 원천'이다. 그의 책 『문학 혐오(The Hatred of Literature)』 는 문학의 길고 긴 수난사를 한 편의 재판 기록처럼 들려준다.


저자의 주장은 간명하다. 우리가 오늘날 고귀한 예술로 떠받드는 '문학'은 애초부터 높은 위치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문학을 부정하고, 배제하려 했던 수많은 담론―그가 반문학(Anti-literature)이라 부르는 것들―과 맞부딪치는 과정에서 비로소 문학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학은 반대자들의 공격으로 겨우 자신의 몸통를 얻은, 일종의 부정적 정의(Negative Definition)의 산물이다. 반문학이 없다면 문학도 성립할 수 없다. 저자는 반문학의 역사를 관통하는 네 가지 전선을 제시한다.


첫 번째 재판: 권위



500px-Plato_Silanion_Musei_Capitolini_MC1377.png 플라톤


문학을 향한 최초의 공격은 '권위'에서 시작되었다. 고대부터 17세기까지 이어진 이 공격의 핵심 질문은 "누가 공적으로 말할 권위를 갖는가?"였다. 당시 말(Logos)은 공동체의 지혜나 신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신성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문학의 역사가 호메로스와 함께 영광스럽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플라톤이 시인들을 도시에서 몰아내면서(with Plato driving the poets out of the city)" 시작되었다고 단언한다.


플라톤은 시인을 '언어의 찬탈자'로 보았다. 시인들은 전문 지식도 없으면서 매혹적인 말솜씨로 대중을 사로잡고, 마치 자신들이 진리를 아는 양 떠들어대며 언어의 위계를 뒤흔든다. 이후 기독교 시대에 접어들며 공격은 한층 강화되었다.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문학은 진리를 흐리는 헛된 우화(fable)이자, 영혼을 타락시키는 위험한 유혹이었다. 이 공격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하나의 체계로 정리된다. 그는 학문의 위계를 정리하면서 시(Poetry)를 최하위 학문(infima doctrina)으로 내려앉혔다. 권위의 공격은 문학에 '말할 자격'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문학을 주변부로 몰아냈지만, 역설적으로 문학이 권력이나 신학에 귀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언어 공간'을 구축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재판: 진리



960px-Encyclopedie_frontispice_section_256px.jpg 샤를 니콜라 코생 - 백과전서 서두 그림 (1772)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접어들며 공격의 양상은 진리의 재판으로 전환된다. 이제 질문은 "그 말이 참인가, 진리인가"로 바뀐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의 지식을 수학과 논리적 질서로 재편하려 했다. 계몽주의자들에게 시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었고, 문학이 주는 감동은 이성의 빛을 가리는 안개에 불과했다.


19세기 실증주의자들은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하게 될 미래에 문학은 '미개한 시대의 유아적 상상력'으로 남을 것이라 예언하며 문학을 지식의 영역에서 축출하려 했다. 20세기 중반 찰스 스노의 '두 문화'(The Two Cultures, 인문학 문화-과학 문화) 논쟁은 이 갈등의 결정판이었다. 스노는 과학 지식만이 세상을 바꾸는 실질적인 지식이며, 문학인들은 현대 문명의 원리조차 모르는 지적 러다이트라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문학은 과학이 포착하지 못하는 '삶의 모호함'과 '인간 실존의 심연'을 자신의 고유한 진리로 선포하게 되었다.


세 번째 재판: 도덕


스크린샷 2026-02-18 193318.png 조제프 데지레 쿠르 - 제르맹의 부재 동안 소일거리를 찾는 리골레토 (1844)


세 번째 재판은 도덕의 이름으로 벌어진다. 19세기 부르주아 사회는 대중을 계몽하는 도덕 교과서 역할을 문학가들에게 요구했다. 1857년 『보바리 부인』의 플로베르와 『악의 꽃』의 보들레르가 법정에 서야 했던 사건은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혐오의 장면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도덕의 공격이 현대의 정치적 올바름(PC)이나 대학가의 트리거 워닝(Trigger Warning) 담론으로도 재현되고 있음을 꿰뚫어 본다. 특정 텍스트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차별적이라는 이유로 작품을 검열하거나 수정하려는 시도는, 문학을 다시금 선량함의 감옥에 가두려는 오래된 욕망의 변주다. 하지만 문학은 이런 공격을 견뎌내며, 도덕 교육의 도구가 아니라 미적 가치 자체로 평가받는 예술적 자율성을 차근차근 쟁취해 왔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문학은 도덕적이지 않아도, 위대할 수 있다고.


네 번째 재판: 사회


dfpaio0nqpqlhlfoza7w.jpg 안젤름 키퍼 - 대제사장 츠바이스트롬란트 (1985-1989)


마지막 재판은 문학의 효용을 따지는 가장 현대적인 공격 방식이다. 자본주의와 산업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문학은 '생산성 없는 활동'으로 낙인찍힌다. 이제 문학은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존재, 심하면 기생충 취급을 받는다. 이 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2006년 프랑스 내무장관 사르코지는 공무원 임용 시험 과목에 라파예트 부인의 17세기 소설 《클레브 공작부인》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두고 이렇게 비꼬았다. "어떤 바보가 은행 창구 직원에게 《클레브 공작부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겠습니까?"


오늘날 사회는 문학에게 묻는다. "너는 사회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 취업률과 시장 가치로 학문의 존폐를 결정하는 시대에, 문학은 가장 먼저 구조조정 대상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문학의 마지막 저항을 본다. 모든 것이 숫자로 환원되는 세상에서, 끝내 숫자로 계산될 수 없는 인간의 경험을 지키려는 것. 그 ‘숭고한 무용함’이야말로 문학이 지닌 사회적 저항의 본령이다.


혐오는 문학이 살아 있다는 증거


97.36_01_b02-Large-TIFF_4000-pixels-long-scaled.jpg 게르하르트 리히터 - Reader (1994), SFMOMA


문학은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 김현 (1942~1990)


문학은 네 가지 재판을 거치며, 권위(철학/신학), 진리(과학), 도덕(종교/교육), 사회적 유용성(정치/사회학)이라는 전통적 지위를 하나씩 잃어버렸다. 결국 문학은 "아무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담론의 찌꺼기(discourse that no one knows what to do with)"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없음'의 상태에서 문학의 힘이 나온다. 문학은 더 이상 권위, 진리, 도덕, 사회적 기능이라는 임무를 짊어지지 않는다. 덕분에 문학은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 된다.


문학은 신화를 통해 권위를 말하고, 리얼리즘을 통해 진실을 제시하고, 비극을 통해 도덕을 탐구하고, 소설을 통해 사회를 그려낸다. 하지만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 어정쩡한 위치야말로 문학의 고유한 힘이다.


반문학은 문학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문학의 힘과 영향력을 증명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문학이 정말로 하찮고 사라진 담론이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미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반문학의 혐오는 문학에 대한 "역설적인 형태의 경의"다. 문학의 진짜 적은, 아무도 문학을 욕하지도 않고, 문제 삼지도 않는 상태, 즉 무관심이다. 저자는 외친다."문학에 대한 혐오보다 훨씬 더 나쁜 것은 무관심일 것이다. 신들이여, 제발 그런 날이 오지 않게 하소서." 마르크스의 책을 덮고 나면, 문학과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쓸모로 환원하는 세상 속에서 문학은, 예술은 그리고 (無用)하기에 유용(有用)하다고.



스크린샷 2026-02-18 195218.png William Marx - The Hatred of Literature,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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