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구원받으리라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넘어서

by 탱귤도령



다운로드 (1).jpeg


모더니즘 문학의 거장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에는 예수회 사제가 지옥의 형벌을 설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숨이 막힐 듯 세밀하게 묘사되는 불길과 악취는 독자를 섬뜩한 공포로 몰아넣는다. 기독교와 무관하게 살아온 이라도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영원토록 지옥불에서 고통받겠냐고 윽박지르는 거리의 전도사를 마주한 기억이 있으리라.


다행스럽게도 이런 류의 소음공해를 잠재워줄 신학적 반격이 있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David Bentley Hart)의 저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다: 천국, 지옥, 그리고 보편적 구원 (That All Shall Be Saved: Heaven, Hell, and Universal Salvation)』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견고하게 구축된 도그마 중 하나인 '영원한 지옥'에 신학적, 철학적, 성서적 정면 승부를 거는 책이다. 동방정교회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저자는 스스로를 초기 기독교의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misericordes)'이라 불린 보편 구원론자들의 후계자로 자처한다. 그에게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군림해 온 영겁의 지옥불 교리는 단순한 오류를 넘어, 신을 향한 중대한 모독일 뿐이다.


Hieronymus_Bosch_013.jpg 히에로니무스 보스 - 축복받은 자들의 승천 (1505-1515)


복음 혹은 잔혹한 농담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는 본래 '복음(Gospel)', 즉 기쁜 소식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다수 정통 신학이 내놓는 결말은 그다지 기쁘지 못하다. 인류 중 선택받은 소수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영원한 불길 속에서 끝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 시나리오가 어떻게 기쁜 소식일 수 있을까. 만약 영원한 지옥이 실재한다면, 기독교는 인류에게 전해진 가장 거대한 악몽일 뿐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그는 비합리적인 공포를 걷어내고 이성과 영성을 결합한 '네 가지 깊은 신학적 묵상'을 통해 영원한 지옥 개념이 신학적으로 허술한 가짜뉴스라는 점을 폭로한다.


960px-William_Blake_003.jpg 윌리엄 블레이크 - 붉은 용과 태양 옷을 입은 여인 (1805)


제1묵상: 무로부터의 창조, 신의 책임


먼저 저자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교리에서 신의 책임을 끌어낸다. 기독교 신학에 의하면 신은 외부 압력 없이 오직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세상을 창조했다. 신은 전지(全知)하기에 창조의 모든 결과를 이미 알았고, 전능(全能)하기에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설계할 능력이 있었다.


여기서 하트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만약 어떤 영혼이 영원한 고통에 처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그 지옥은 신이 창조라는 목적을 위해 기꺼이 지불하기로 합의한 대가가 된다. 하트는 이를 악신론(惡神論)이자 악마적 발상이라 일축한다. 영원한 지옥을 전제하는 순간 신은 사랑의 아버지가 아니라 전능한 폭군으로 전락한다.


창조의 목적이 한 영혼이라도 영원한 파멸로 몰아넣는 것이라면, 창조는 신의 선함이 아니라 신의 본성 자체가 악과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창조의 시작이 신의 자유였다면, 그 완성 역시 모든 존재의 회복(ἀποκατάστασις)으로 귀결되어야만 논리적 일관성이 확보된다. 그렇지 않다면 창조는 실패한 기획 혹은 악마적인 장난에 불과하다. 신의 선하심과 영원한 지옥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다.


제2묵상: 오역이 빚어낸 공포의 역사


대중은 성경에 영원한 지옥의 개념이 명시되어 있다고 믿지만, 하트는 그것이 무지가 낳은 엉뚱한 오해라고 지적한다. 그는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단어 '아이오니오스(aiōnios)'를 정밀 타격한다. 전통 번역은 이 단어를 '영원한'으로 옮겼으나, 실제 문맥에서 이 단어는 '한 시대에 속한' 혹은 '한정되지 않은 긴 시간'을 뜻한다. 저자의 해석을 따르자면 성서가 말하는 심판은 끝없는 고통이 아니라, '다가올 시대'에 이루어질 정화와 교정의 과정이다.


하트는 바울 서신에 흐르는 압도적인 보편주의 구절을 인용한다.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라고 명확하게 선포한다. 전통 신학은 보편 구원의 선언을 '과장'이라 치부하면서도, 지옥에 관한 비유적인 이미지들—게헨나의 불, 벌레 등—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의성을 보였다. 저자는 심판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회복'임을 분명히 한다.


Grunewald_-_christ.jpg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 부활 (1512-1515)


제3묵상: 타자 없이 홀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트의 세 번째 논증은 인격의 본질을 성찰한다. 그는 인격을 고립된 개별 실체가 아니라 관계의 연결망으로 정의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를 구성하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결정된다.


만약 내 어머니나 자녀, 이웃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다면, 천국에 있는 나는 온전한 나 자신일 수 있을까? 사랑의 본질이 타자와의 연대라면, 한 명의 영혼이라도 지옥에 남아 있는 한 그 누구도 온전히 구원받지 못한다. 전통 신학은 성도들이 지옥의 고통을 보며 신의 정의를 찬양하거나, 신이 성도들의 기억을 지워 행복을 보존할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하트는 이를 '하늘의 뇌 절제술(Celestial lobotomy)'이라 부르며 조롱한다. 기억과 사랑이 소멸된 존재는 이미 구원받은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형제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백색 날개를 달고 하프를 켜는 천국은 존재할 수 없다. 인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의 충만함(Pleroma)을 이루며, 단 한 명의 낙오자라도 있다면 구원의 드라마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제4묵상: 자유의 참된 의미


지옥 옹호론자들은 인간이 신을 거부할 자유를 존중하기에 지옥이 허용된다고 말한다. 하트는 이 논리가 현대적 자유 개념에 기초한다고 반박한다. 기독교에서 참된 자유란 단순히 '이것저것 고를 수 있는 임의적 권력'이 아니라, 지성적 존재가 자신의 목적인 '선(Good, 善)'을 향해 방해 없이 나아가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선택하는 것이 자유의 실현이듯, 인간의 의지가 궁극의 선(善)인 신을 향하는 것은 필연이자 최고의 자유다. 신을 영원히 거부하는 의지는 자유로운 의지가 아니라 무지에 사로잡힌 '노예 상태'의 의지일 뿐이다. 전능한 신은 인간의 의지를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영혼이 결국 기꺼이 신을 선택하도록 이끈다. 자유롭고 제정신인 존재가 자신의 영원한 파멸을 선택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모든 자유의지는 자신의 시원이자 목적인 신에게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옥에 영원히 머무는 영혼이 있다는 가정은 신이 그 영혼의 무지와 광기를 방치한다는 뜻이 되며, 이는 신의 전능함과 선하심을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아포카타스타시스 (회복)


kptzp79m5s7d1.jpg 귀스타브 도레 - 천국의 장미 (1867)


저자는 보편 구원이 기독교 신학이 성립하기 위한 유일한 논리적 토대라고 소리 높인다. 지옥은 실재할 수 있나, 그것은 신의 무한한 사랑이라는 뜨거운 불꽃 속에서 자아의 찌꺼기를 태워 없애는 정화의 과정이지 영원한 종착역이 될 수 없다. 하트가 그려내는 신은 자신의 정의를 위해 희생 제물을 요구하는 피에 굶주린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피조물을 반드시 건져 올리고야 마는 압도적인 사랑의 신이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진정 '기쁜 소식'이라면, 그것은 희생자와 낙오자가 없는 완성의 이야기여야 한다. 필자 같은 비(非)신앙인에게도 하트의 논증은 상당히 매혹적이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기독교 전통 속에서 여전히 외로운 소수파의 목소리다. 지옥의 공포와 선별적 구원을 동력 삼아 세를 불려 온 현실 기독교가 보편적 구원의 신학을 흔쾌히 받아들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 보인다. '우리'와 '그들'의 이분법 구도와 지옥의 형벌을 강조하는 낡은 관념이 지배하는 한, 이 찬란한 회복의 비전은 아득한 이상향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보편적 구원의 복음이냐? 선택받은 자들의 폐쇄적 낙원이냐? 선택은 기독교인들의 몫이다.


618rda8leAL._AC_UF1000,1000_QL80_.jpg That All shall be Saved - David Bentley Hart, 2019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