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보다는 여우의 지혜를 권한다
친구들과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왔다고 가정해 보자. 처음에는 가벼운 안부로 시작하지만 곧이어 복지나 젠더, 이민 정책을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 한쪽은 통계와 도덕적 당위를 내세우며 상대를 설득하려 하고, 다른 쪽은 현실을 모르는 몽상이라며 냉소한다. 상대방이 제시하는 팩트나 통계는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고, 서로를 '말이 안 통하는 사람'으로 낙인찍고 한숨과 함께 '술이나 먹자'는 결론으로 끝난다. 우리는 왜 본인이 합리적이라고 내심 믿으면서도 자기 생각의 우물 안에 갇혀 상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아자 가트(Azar Gat) 교수는 이스라엘의 역사학자로, 전쟁과 평화, 인류 문명의 진화적 기원을 탐구해 왔고, 한국에는 『문명과 전쟁』 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고착: 석기시대부터 오늘날의 문화 전쟁까지(Ideological Fixation: From the Stone Age to Today's Culture Wars)』 에서 우리가 왜 특정 이념에 그토록 맹목적으로 집착하는지, 그 기저에 깔린 심리학적 설계와 역사적 배경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보통 이데올로기를 근대 계몽주의나 19세기의 산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념적 사고방식과 심리적 고착은 인류의 마음속에 내재한, 기원이 굉장히 오래된 본능이다. 그는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말한 '빠른 생각(시스템 1)'과 '느린 생각(시스템 2)'에 더해, 이념적 사고를 일종의 '제3의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이는 복잡한 세상을 빠르게 해석하고 반응하기 위해 우리 뇌가 미리 만들어둔 내면의 '템플릿'이다.
석기시대의 척박한 환경에서 우리 조상들은 생존을 위해 빠른 판단을 내려야 했다. "누가 우리 편인가?"를 가려내는 능력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부족주의'는 현대에 와서 국가주의나 특정 정당 지지로 형태를 바꿨을 뿐, 심리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우리가 특정 이념에 고착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논리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그 이념이 나를 보호해 주는 '집단 정체성'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뇌가 생존을 위해 구축한 개념적 격자(Conceptual Grids)를 거쳐서 인식할 뿐이다. 우리는 무한한 현실을 유한한 언어와 개념으로 압축해 이해하는데, 이 과정에서 불가항력으로 '요약'과 '편집'이 발생한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현실 전체가 아니라 우리 뇌가 사용하기 편하게 가공한 '지도'일 뿐이다.
이 불완전한 지도에 도덕이 끼어들면 상황이 한층 복잡해진다. 가트는 도덕을 우주의 객관적 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적 반응으로 본다. 진화 과정에서 조상들은 집단 내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공감', '죄책감', '수치심' 같은 도덕적 기제를 발달시켰다. 도덕적 감정은 사실(Is)과는 별개인 당위(Ought)의 영역이지만,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객관적 진리인 양 투사한다. 논쟁이 벌어질 때 우리가 사실관계보다 도덕적 정당성에 집착하는 이유는 우리 뇌가 팩트 체크보다 '집단 내 정당성 확보'에 더 최적화된 탓이다.
가트는 종교를 이데올로기의 '원형'으로 본다. 석기시대의 애니미즘부터 대형 제국의 조직 종교까지, 종교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집단을 결속시키는 강력한 도구였다. 계몽주의 이후 신의 죽음이 선포된 뒤 공석이 된 왕좌에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파시즘과 같은 현대의 이념들이 들어섰다. 가트는 이러한 현대 이념들을 종교의 빈자리를 채운 '세속 종교(Secular religions)'로 칭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사회주의는 만민 평등을, 파시즘은 국가적 일체감을 구원의 메시지로 제시한다. 이들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지지자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반대파를 '이교도'로 간주하며, 현실의 복잡성을 제거한 단순한 도그마를 제공한다. 현대의 이념 전쟁이 종교 전쟁만큼이나 격렬하고 비이성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상대방의 주장을 관용하고 인정하는 일은 신앙을 저버리고 집단에서 축출되는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능적인 '고착'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가트 교수는 몇 가지 팁을 전수한다. 우선 우리 모두 이념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정의'가 실은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이나 진화적 본능의 산물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또한, 그는 '결과론적 도덕'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나의 의도가 아무리 선하고 정의롭더라도, 그것이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저자는 이념적 광풍 속에서도 객관성을 유지하라고 촉구한다. 가트는 '고슴도치와 여우' 우화를 들고 온다. 이 비유는 고대 그리스의 시구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안다"에서 유래한다. 고슴도치는 세상의 모든 복잡한 문제를 하나의 거대한 원리나 이념으로 설명하려 들지만, 여우는 세상이 결코 하나의 정답으로 요약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수많은 작은 진실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인다. 맹목에서 벗어나려면 하나의 진리에 매몰된 고슴도치의 확신을 내려놓고, 현실의 다채로운 결을 읽어내는 여우의 시선을 채택해야 한다. 이념의 요새가 감옥이 되지 않게 하려면 현실을 향한 창문을 항상 열어두어야 한다.
가트의 책은 특정 이데올로기에 광신적으로 집착하는 이들을 매섭게 공격한다. 하지만 그의 책에도 아쉬운 지점이 많다. 일단 저자는 자연주의적 오류에 자주 매몰된다. 가트는 인류가 부족주의와 가부장제, 폭력적 갈등 속에 진화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진보적 운동을 '본능을 거스르는 실패가 예정된 무익한 일'로 규정한다. 사실 진보주의자들에게 문명이란 바로 그 '본능'을 제도로서 통제하는 과정이다. 진보는 '석기시대의 뇌'라는 감옥을 인식하고, 그 한계를 이성으로 돌파해 더 넓은 연대의 원을 그리는 작업이다. 가트는 본능을 핑계로 인간 행동의 광대한 스펙트럼과 제도 설계의 힘을 과소평가한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인간 본성을 무시한다는 비난도 부당한데, 세련된 진보주의자 중 생물학적 차이나 유전적 본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이는 드물다. 진보적 지식인의 경계대상은 생물학적 '차이' 자체가 아니라, 차이를 근거로 '차별'과 '불평등'을 고착화하려는 시도다. 가트는 자신이 이념에 덜 휘둘리는 냉철한 리얼리스트라고 포장하지만, 결국 그의 리얼리즘은 "인간은 원래 부족적이며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니, 세상을 바꾸려는 거창한 시도는 금물이다"라는 보수적 메시지로 수렴한다. 특히 진화심리학을 토대로 젠더 차이를 강조하거나 제국주의를 재평가하는 대목은 신랄하게 비판받아 마땅하다. 저자가 현대 페미니즘이나 탈식민주의 담론의 정교한 연구 성과들을 온당히 검토는 했는지 의문이다.
맹목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저자의 주장조차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또 다른 이데올로기다. 애석하지만 인간은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여우의 지혜가 필요하다. 집단 광기에 취약한 '석기시대의 본능'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다스릴지 고민하는 것. 고슴도치의 확신을 버리고 여우의 유연함을 실천하는 길에 참된 지성인의 자리가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