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불교를 비판하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by 탱귤도령


'심리적 불교인'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는지? 절에 가서 꼬박꼬박 불공드리는 정통 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에 매력을 느끼는 비불교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불교는 배타적인 기성 종교에 거부감을 느끼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한결 매력적인 선택지로 자리매김했다. 온화하고 사려 깊으며, 내면을 다스리는 종교의 이미지로 말이다. 글렌 월리스(Glenn Wallis)의 『서구 불교 비판 (A Critique of Western Buddhism)』 은 이러한 현대 불교의 안온한 수면 위로 폭탄을 던지는 책이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산스크리트 및 인도학(불교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이자, 강단을 넘어 활동하는 독립 지식인인 월리스는, 서구적 맥락에서 세련되게 가공된 이른바 '서구 불교(Western Buddhism)'가 인간의 실재적 고통을 은폐하고 자본주의적 질서에 순응하게 조장하는 아편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불교는 '지혜의 덫'


니콜라스 로에리히 - 부처, 승리자 (1925)


월리스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현대 불교를 'X-불교'라고 명명한다. 여기서 'X'는 선(禪), 티베트, 마음챙김(Mindfulness) 등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그에 따르면 이들 X-불교는 공통적으로 '지혜의 덫'에 갇혀 있다. 불교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하는 해독제 역할을 자처하지만, 월리스가 보기에 그것은 오히려 고통의 원인을 개인의 마음 문제로 국한함으로써 사회구조적 모순을 망각하게 만드는 독소가 된다.


우리는 마음챙김을 통해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명상으로 내면의 평화를 찾는다. 월리스는 묻는다. 그 평화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본주의 시스템은 노동자들이 번아웃에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기를 원한다. 이때 불교는 시스템을 향한 저항을 거세하고 개인의 수용(acceptance)만을 강조하는 완벽한 도구가 된다. 불교적 지혜가 실상은 체제 순응적인 '자기계발'의 가면을 쓰게 된 것이다.


실재(The Real)로의 육박: 불교적 환상을 깨부수기


니콜라스 로에리히 - 샴발라로 가는 길 (1933)


이 책의 핵심 비판은 불교가 '실재'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월리스는 프랑수아 라뤼엘의 '비철학(Non-philosophy)'과 라캉의 '실재' 개념을 빌려와 불교를 해부한다. 우리는 불교의 '공(空)'이나 '열반'을 궁극적 진리이자 실재라고 믿지만, 월리스는 이것이 '불교적 실재(Buddhist Real)'라는 이름의 개념적 구성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즉, 불교가 제시하는 실재는 날것의 실재가 아니라 교리적 필터로 걸러지고 미화된 상징적 재구성의 산물이다.


월리스가 강조하는 '실재'는 평온한 깨달음의 상태가 아니다. 라캉의 관점에서 실재는 상징계 (언어·질서)가 포섭하지 못하는 잉여이자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려 할수록 균열을 일으키는, 치유될 수 없는 무엇이다. 진짜 실재는 명상 방석 위의 평온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병, 죽음, 부조리, 그리고 자본주의와 국가 시스템의 폭력적인 현장 속에 있다. 월리스는 불교가 실재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 일갈하며, 불교적 세계관이라는 안전한 성벽을 허물고 그 성벽 밖의 '실재의 폐허'로 걸어 나가야 한다는 주장한다.


비불교(Non-Buddhism)와 불교 픽션(Buddhofiction)


마크 로스코 - 검은색 위의 밝은 빨강 (1957)


그렇다면 우리는 불교를 완전히 버려야 하는가? 월리스는 '비불교(Non-Buddhism)'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불교의 교리와 수행법들을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실재와 대면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실험 도구이자 재료, 즉 '불교 픽션(Buddhofiction)'로 보자는 제안이다. 불교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불교의 언어를 빌려 우리 시대의 실재적 고통을 새롭게 기술할 수 있게 된다. 수행은 이제 내면의 평화를 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실재의 폐허 속에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투쟁으로 변모한다. 명상은 고요한 호흡으로 돌아가는 안식처가 아닌, 우리를 에워싼 이데올로기의 장벽이 무너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정당한 비판인가?


폴 고갱 - 붓다 (1895)


불교는 사찰이나 명상 센터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미 우리 시대 문화적 문법의 일부가 되었다. 그렇기에 불교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곧 이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해부하는 작업이다. 월리스는 불교가 진정으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한다면, 화려한 법복을 벗고 실재의 진흙탕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결단을 촉구한다.


그러나 급진적인 논조의 책들이 으레 그렇듯이 의문이 남는 지점이 적지 않다. 첫째, 서구 불교를 지나치게 동질적인 운동으로 일반화하지 않았는가? 둘째, 연기와 공(空)의 가르침이 오히려 작금의 고착된 체체를 무너뜨리는 혁명적 사유가 될 수 있지 않는가? 사실 월리스가 끌어들이는 라캉의 실재 개념은 상상계/상징계/실재계라는 삼항 구조를 지닌다. 반면 중관학파 등의 불교 전통은 공성(空性)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구조 자체를 해체한다. 누가 더 급진적인가?


저자가 제시하는 비불교(非佛敎) 프로젝트도 의심스럽다. 불교가 실재를 위장하고 자기 체계를 세운다는 지적은 이미 불교사에서 숱하게 논의된 바 있다. 선불교의 공안은 체계를 무너뜨린다. 중관은 모든 견해를 의심한다. 유식 철학은 인식 구조를 분석한다. 불교는 태생적으로 '자기-해체적'이다. 비불교라는 프로젝트 자체도 결국 불교의 일부가 아닌가?


세계는 아이러니하고 아리송하다. 불교를 '기만적 이데올로기'라며 비판하는 철학도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불교를 해탈의 길이라 부르는 순간 그조차도 이데올로기가 된다. 결국 헐벗은 질문만 남는다.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놓을 수 있는가?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실재의 사막을 견딜 수 있는가? 월리스의 책은 불교를 서양철학·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비판했지만 결국 불교 철학이 탐색했던 절대적 허무와 공(空)의 지도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비불교 프로젝트에 아쉬움이 크게 남는 이유다.


A Critique of Western Buddhism - Glenn Walli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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