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용기
이제 곧 나이 40을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항상 어렵고 망설여지고 입 밖으로 잘 안 나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다름 아닌 "미안해"라는 세 글자. 항상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 사과를 하는 게 도덕적으로 중요하다고 책에서, 학교에서, 티브이에서까지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막상 내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가끔 정양과 투닥거릴 때가 있다. 생각해 보면 내가 한 번 더 신경 썼더라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이었는데 괜한 일로 서먹해진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 미안하다는 마음이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왜 그런 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약간의 자존심과 부끄러움, 창피함 이런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가끔 내 잘못 때문에 오랜 시간 뭔가 어색한 공기가 집안에 흐르고, 그로 인해 정양도 스트레스를 받을걸 생각하면 미안함이 계속 쌓여간다. 그리고 속으로 계속 생각한다. 그리고 결심한다. 그래, 먼저 가서 이야기하자.
"정양, 미안해"
며칠 전에 어린이집에 홍시를 픽업하러 갔다가 선생님께 낮시간에 일어난 일을 들었다. 홍시가 친구들이랑 놀다가 친구에게 장난감을 던졌고, 그게 친구 얼굴에 맞아서 친구가 엄청 울었다고 했다. 나와 정양은 선생님께 사과를 드리고 집에서 잘 가르치겠다고 이야기드리고 어린이집을 나섰다.
정양과 나는 홍시 양손을 한쪽씩 잡고 집으로 가는 길에 조심스레 오늘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 물론 홍시 머릿속에는 어린이집에서 재미있었던 일만 있었는지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는 홍시와 놀아주다가 무릎에 앉힌다음 오늘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물어봤다. 오늘 친구한테 장난감을 던져서 친구가 울었냐고 물어보니 맞다고 한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같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던졌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친구한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냐고 물어봤다.
홍시가 친구에게 장난감을 던진 게 일부러 그런 건지, 실수로 그런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설령 친구가 홍시를 못살게 굴어서 홍시가 그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난감을 친구한테 던지는 행동은 어떠한 이유로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끼리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말씀해주셨지만, 나는 요새 홍시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이제 홍시가 인지능력이 충분하고 어느 정도 스스로의 충동을 다스릴 수 있는 나이라 생각이 들었기에 꼭 사과하는 법을 알려 주고 싶었다.
무릎 위에 앉은 홍시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나씩 설명했다. 홍시가 장난감을 던져서 맞은 친구는 얼마나 아팠을지, 갑자기 날아온 장난감에 얼마나 놀랐을지, 친구라 생각한 홍시가 미워지진 않았을지에 대해서 차분히 설명해 줬다. 그리고 그런 친구에게 홍시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설명해 줬다. 친구에게 다가가서 '미안해'라고 진심으로 말해야 한다고.
그렇게 어느 정도 설명을 해주고 나서 홍시에게 내일 친구한테 가서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부끄러운 척 고개를 숙이며 고개를 젓는다. 그래서 한 번 더 장난감에 맞은 친구가 얼마나 아팠을지, 마음이 얼마나 상했을지 이야기해주고, 그걸 낫게 하는 방법은 "미안해"라는 말이라고 알려줬다. 그렇게 몇 번의 설명 끝에 홍시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친구에게 가서 "미안해"라는 말을 하기로 말이다.
그렇게 홍시와 이야기를 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이들 역시 사과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구나. 집에서도 내가 먼저 잘못한 일이 있으면 항상 먼저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엊그제 셋이서 저녁을 먹으면서 홍시가 엄마를 실수로 아프게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홍시가 한 행동 때문에 엄마가 아프다고 설명해주고, 홍시가 사과를 해야 엄마가 아픈 게 낫는다고 이야기해줬다. 처음에는 몸을 베베 꼬면서 부끄러운 척을 했지만, 잠시 후 결국 엄마 눈을 보고 말했다.
"엄마, 미안해요"
아이를 키우면서 내 삶을 많은 부분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이번에 아이에게 사과하는 법을 가르쳐 주려다 보니, 나는 과연 이제껏 항상 상대방을 배려하고 잘못한 일에 대해서 늦지 않게 사과를 했었던가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아이를 위해서도 작은 부분부터 솔선수범 하는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되면 진짜 어른이 된다고 하는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 요새 정말 많이 느끼는 것 같다. 홍시를 키우면서 나도 진짜 어른이 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