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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티 Sep 03. 2021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늦은 여름이었다. 김일성 주석이 죽은 후 두어 달 지났을 때였을까? 오래전 일이라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우리가 바라보았던 도시의 야경과, 그 불빛들을 훑으며 불어온 바람의 촉감은 생생하게 기억한다. 산울림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간주 구간에 나오는 맑은 건반 소리처럼, ‘나무처럼 싱그런’ 바람이었다.


잎새 끝에 매달린 햇살 / 간지런 바람에 흩어져 / 뽀얀 우윳빛 숲속은 / 꿈꾸는 듯 아련했어 (…) 나무처럼 싱그런 그날은 /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 산울림 1집 수록곡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중에서


여름방학이었다. 우리는 대학 졸업반이었다. 나는 중·고등학교 과학교사가 되기 위한 임용시험을 앞두고 있었고, 그는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둘은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그의 학교도 나의 학교도 아닌, 학생증 없이도 출입이 자유로운 타 대학교 작은 열람실에서 만나 공부했다. 연애를 시작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연인이 같이 공부를 한다고? 시도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게 얼마나 불가능한지…. 우리는 도서관 주변의 매점이나 벤치에서 웃고 떠들며 주로 시간을 보냈다.

그날 저녁, 늦더위에 지친 상태로 언덕 위에 있는 도서관을 나와 언덕 아래 교문까지 걸어 내려갔다. 학교는 한산했다.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얘기했다. 아마도 반주를 하며 식사도 할 수 있는 장소로 가자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다니던 치과 이야기도 했다. 치료도 거의 끝나가니 술을 마셔도 되지 않을까, 뭐 이런 이야기.

그때,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내 뺨을 스치고 긴 머리카락을 나풀거리게 했다. 해가 지려는 듯, 멀리 한강 위의 하늘이 다홍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바람은 해가 있는 그쪽 어딘가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에서 희미하게 가을 냄새가 났다. 그해 여름의 폭염은 대단했다. 바람을 맞으며, 지독했던 더위도 드디어 끝나가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설렜다. 우리의 첫가을이 기대되었다. 스물세 살이었다. 그땐 한 계절 한 계절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릿느릿 지나갔다. 한 계절마다 기승전결 구조가 완벽한 하나의 스토리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색이 변해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걸어갔다. 서서히 어두워지며 도시의 불빛이 드러나고, 멀리 서강대교의 가로등이 켜지면서 다리의 형태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의 팔을 꼭 잡고 걸어가는데, 이상하게도 가까이 있는 그의 모습보다 멀리 있는 풍경들이 더 선명해 보이는 것 같았다. 늦여름의 선선한 바람과 발아래로 펼쳐지는 석양 속 도시 야경은 완벽한 저녁 풍경을 만들었다. 그 안의 우리도 완벽했다.


그렇게 말없이 걸어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먼 미래에 나는 지금 이 장면을 아련하게 추억하겠지. 청춘의 빛나는 한때로 회상하겠지. 아마 그땐 지금과는 모든 게 달라져 있을 거야.’

이것은 일종의 예감이었다. 미래의 나와 연결된 실 한 가닥을 쥐고, 그 진동으로 메시지를 전달받는 느낌. ‘지금’을 추억으로 떠올리는 미래의 내 안으로 잠깐 들어가보는 묘한 경험. 낯선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욱 뚜렷하게 각인되어 버렸다. 그날의 저녁이.

예감은 적중했다. 나는 가끔 그날을 떠올린다. 그 풍경은 내 청춘의 대표 장면이 되었다. 오래된 책을 대충 넘겨보는데, 오래전에 모서리를 접어놓아 제일 먼저 펼쳐지는 기억의 한 페이지 같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이후로 조금씩, 나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중심축이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산울림의 노래처럼 ‘꿈꾸는 듯 아련한’, 해맑았던 그해 여름, 그 청춘의 정점을 지나 가을과 겨울을 보내면서 나는 세상이 그저 해맑지만은 않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도 변해갔다. 물론 우리의 관계도. 마냥 즐겁던 연애의 순간에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장래에 대한 불안감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둘 다 시험에서 떨어졌고, 이후 각자 자신의 공간에서 생활하며 시험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두 달 후였던가,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그리고 다음 해엔 백화점이 붕괴되었고, 몇 년 후엔 나라의 경제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속에서 나의 청춘은 간다는 인사도 없이 어느 순간 날 떠났고, 그 사람도 그 풍경도 함께 사라졌다. 이후 세월의 책장은 정신없이 ‘휘리릭’ 넘겨져, 나는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며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지금 나는, 시간이 빛의 속도로 흘러간다는 문장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몇 년이 뭉텅이로 휙휙 지나가는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십이 코앞이다.


그 저녁 이후,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미래의 내가 되어 ‘지금’을 과거로 회상해보는 버릇. 우리에게 시간은 아날로그라 연속적으로 흐른다. 하지만 기억은 뜨문뜨문 불연속적인 장면으로 존재한다. 식탁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지금의 나는, 사라지지 않을 기억이 될까, 버려질 기억이 될까?

이런 생각에 몰입하다 보면, ‘지금 이 시각’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꾸 ‘순간’의 시공간이 내게 착 붙지 못하고 ‘미끄덩’ 미끄러져 멀어져가는 것 같다. 이러면 곤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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