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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티 Sep 14. 2021

잉크는 어떻게 증식하는가?

 문구를 넣어 두는 수납장을 열면, 많은 잉크병이 보인다. 세어 보기 겁이 날 정도다. 만년필을 사용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한 병으로 시작한 만년필 잉크가 저렇게 많아졌다. 저것들을 모두 내가 샀다는 거겠지? 내가.

 잉크들은 마치 세포분열로 증식하는 단세포생물처럼, 조용히 빠르게 늘어나 있었다. 만년필 마니아들은 이런 경우를, ‘잉크가 증식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개미지옥에 빠졌다’라고 한다. 개미귀신은 명주잠자리 애벌레로 주로 개미를 잡아먹으며 살아간다. 개미지옥은 개미귀신이 먹이를 잡기 위해 땅에 파 놓은 구멍이다. 개미는 개미지옥에 빠지면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문덕’(문구 덕후의 준말, 덕후는 마니아라는 뜻)은 만년필과 잉크의 늪에 빠지면 벗어나기 힘들다. 그들은 절제할 수 없는 구매 욕구에 지배당해, 정신없이 인터넷 쇼핑을 하게 되고, 현관엔 택배 상자들이 쌓이게 된다. 그렇게 잉크의 개미지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만년필로 필기하는 ‘맛’을 알게 되면서, 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잉크로 넘어갔다. 잉크의 색들은 다양했다. 색을 좋아해서 다양한 색에서 긍정의 에너지를 얻는 내게, 잉크의 세상은 신나는 놀이터였다. 컬러 잉크 덕분에 쓰는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소설을 필사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았다.  

  점점 더 다양한 색을 탐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만년필 마니아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문구 회사들은 수시로 한정 판매 잉크를 출시하며 유혹했다. ‘한정판’이라니! 이 얼마나 가혹한가? 한정된 수량만 만들어 출시하기에 완판(完販)되면 더는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취향 저격’의 잉크를 가질 수 없는 것은 악몽이다. 특히 만년필계의 명품브랜드라는 M 사는 일 년에 몇 번씩 한정판 잉크를 출시했고, M 사의 한정판 잉크들은 색감과 안정성이 뛰어나 그들의 상술을 뻔히 알면서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잉크의 개미지옥에 빠진 ‘문덕’이 아니던가?

  만년필 사용 초기에는, 한정판 잉크가 출시되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미 구입한 사람들이 올려놓은 발색 사진과 구입 후기 등을 토대로 구매 여부를 결정했다. 모든 한정판을 사기에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일단 구매하기로 결정한 후엔 수량을 결정해야 했다. 과연 이 잉크가 나의 취향에 맞을지 써보지 않고는 알 수 없어 만년필 사용자로서의 예지력을 최대한 발휘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M 사의 톨스토이 잉크(M 사는 잉크에 작가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나를 만년필 세상으로 이끈 선구자 같은 친구가 이 잉크는 꼭 사야 한다고 했다. ‘이건 꼭 사야 해’라는 말에 쉽게 현혹되는 나는, 무조건 구매하기로 마음먹고, 검색을 통해 발색 사진을 살폈다. 톨스토이는 평범한 파란색처럼 보였다. 그래서 한 병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미 푸른색 계열의 잉크들이 많기에 더 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보통의 작가가 아니듯이, 잉크 역시 보통의 파란색이 아니었다. 처음 사용할 때엔 몰랐다. 예상대로 평범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톨스토이로만 필사를 하고 있었다. 세계적 대문호로 문학사에 한 획, 아니 많은 획을 진하고 확실하게 그은 톨스토이 이름에 어울리게 빈티지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파란색이었다. 그러면서도 절대 튀지 않아 매일 써도 질리지 않았고, 써 놓은 글자들은 시간이 지나 마르면서 더 매력적인 색으로 변해갔다. 톨스토이로 쓴 글자로 가득한 노트를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너무 늦게 톨스토이의 진가를 알아본 것, 이것이 바로 비극의 시작이었다. 

  톨스토이 잉크의 양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불안했다. 그래서 더 구해보려고 매장과 인터넷 쇼핑몰을 돌아다녔다. 허나, 이미 다 매진, 솔드 아웃(Sold Out)이었다. 내게 예뻐 보이는 것은 남들에게도 예뻐 보인다. 이미 톨스토이는 전설의 잉크가 되어있었다. 나처럼 톨스토이를 구하려고 노력 중인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이들도 탐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지고 싶다는 욕구는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이미 솔드 아웃. 잔인한 단어, 솔드 아웃! 

  문구계의 마당발인 친구에게 톨스토이를 구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이전에 품절된 잉크를 구해준 적이 있는 친구였기에 희망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친구도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문구계의 마당발이자, 구하기 힘든 ‘희귀 아이템’을 집에 숨겨 놓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 친구라, 분명 친구에겐 여분의 톨스토이가 있을 것 같았지만, 나만큼 톨스토이를 아끼는 것을 뻔히 알기에 친구 것을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마니아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였다. 혹시나 해서 중고매매 사이트를 기웃거렸지만, 어쩌다 톨스토이 잉크가 나오면 빛의 속도로 거래되어 손이 느린 나는 흥정에 낄 수도 없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구할 수 없었다.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      


  이런 일을 겪은 후, 인터넷 매장에서 한정판 잉크라는 단어만 보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져 ‘구매하기’ 버튼을 누르게 된다. 물론 구매 수량은 두 병. 이는 러시아 문학의 거장인 톨스토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경험에서 나온 불안감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의 수납장엔 한정판 잉크들이 점점 증식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 생텍쥐페리, 마일즈 데이비스, 비틀스 잉크 등등…. 모두가 짝을 지어, 곧 병의 바닥이 보이려는 거장 톨스토이를 중심으로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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