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소리 22연타

by HTG

A Day in the Life

죽은 노파의 컬랙션


1. 미국에 Estate Sale 이라는 게 있다. 동네에 사람이 죽었을 때 (보통은 혼자 사는 사람이 죽었을 때) 망자의 집안의 물건들 을 통째로 파는 세일이다.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가구, 벽시 계, 커튼, 옷... 심지어 숟가락까지 모두 판매의 대상이다.

Estate Sale이 흥미로운 건 죽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 볼 수 있 어서다. 아직도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는, 깨끗이 정리된 집안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고르는 건 묘한 스릴이 있다. 마치 합법적인 도굴꾼이 되어 누군가의 무덤을 뒤지는 기분.


2. 몇 년 전에 있었던 일. 하루는 와이프가 무거워 보이는 상자 를 낑낑 들고 집에 들어왔다. 상자 안에는 곰팡이내가 밴 오래된 LP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얼핏 봐도 상당한 양이다. 근데 이게 전부가 아니란다. 차 트렁크에 몇 박스 더 있으니 가지고 들어오 란다. 아니. 이 많은 LP가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니, 동네에 홀로 살던 노파가 며칠 전에 죽어서 Estate Sale에 다녀오는 길이란 다. 그리고는 활짝 Happy Birthday!


3. 내 생일이 있는 여름의 끝자락은 촬영으로 가장 바쁠 때다.

가을과 겨울은 편집으로 눈코 뜰 새 없고. 난 그해 연말이 되어 서야 겨우 작업실 한쪽에 수북이 쌓아놓은 죽은 노파의 레코드 를 뒤적여 볼수 있었다. 총 183장의 낡은 LP들 덕분에 작업실 에선 늘 동네 헌책방에서나 나던 냄새가 났다. 새해가 되자 난

'죽은 노파의 컬렉션'을 그해 안에 모두 클리어하자는 목표를 세 웠다. 규칙은 - 아무리 음악이 별로라도 A/B를 다 들을 것. (그 게 뮤지션에 대한 예의니까) 음반 한 장을 클리어할 때마다 기념 으로 재킷 사진을 찍을 것. 음반을 듣는 순서는 그냥 손에 잡히 는 대로.


4. '죽은 노파의 컬렉션'은 흥미로운 레코드로 가득했다. 옛날 서커스 음악. 전설의 컨츄리 가수 헹크 윌리엄스의 50년대 음반 들. 60년대에 발매된 댄스 튜토리얼은 레코드 속지에 댄스 동작 이 그려져 있다. 70년대 TV 에반젤리스트의 뜨거운 부흥회. 척 배리의 유일한 No.1 싱글 "My Ding-a-Ling"의 무편집 라이 브가 실린 1972년 런던 척 베리 세션. 요절한 천재 가수 마리오 란자의 리더스다이제스트 한정판은 너무나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어서 마음이 짠했다. 속지와 슬리브가 구겨질라, 조심스레 앨 범을 꺼내던 그녀의 마음이 느껴질 정도. 1952년에 결성된 노 바스코샤의 최초의 여성 백파이프밴드의 앨범은 박물관에 기증 해도 될 듯. 그리고 일곱 장의 크리스마스 케롤...

누군가가 평생 수집한 음악을 듣는 건 그 사람의 일기장을 들춰 보는 것처럼 은밀한 일이다

5. "Sound of Vanishing Era" (사라진 시절의 소리) 어느 날 노파의 컬렉션에서 집어 든 앨범의 타이틀. 앨범 재킷은 커다란 증기기관차의 사진이다. 레코드를 꺼내 플레이어에 걸 자...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자, 서서히 다가오는 기차 소리.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가 가까워질수록, 기차 소 리는 점점 더 요란하고 빨라진다. 칙칙폭폭칙칙폭폭. 질주하던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서며 속도를 줄이자 쇠와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공기를 찢는다. 끼이익. 쿵... 휘리릭. 기차의 도착을 알 리는 휘슬 소리. 눈을 뜨자, 거대한 기차가 눈앞에 있다. 사람들 의 웅성거림과 발걸음 소리. 잠시 후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멀어 져간다. 기차는 떠나간 걸까? 아니다. 다시 멀리서 들려오는 기 적소리. 칙칙폭폭 칙칙폭폭. 앨범 전체가 칙칙폭폭의 무한반복.

헐...

6. 대철도 시대의 향수를 간직한 사람들을 위한 기획상품이었을 까? '죽은 노파의 컬렉션'에는 이런 종류의 기차 레코드가 무려 스물두 장이나 있었다. 이 레코드들은 대부분 '그때를 기억하는 가?' '과거로의 여행''기적을 울리며 남부로!"와 같이 향수를 자 극하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기차 레코드의 특징 중 하나는 재킷 의 뒷면에 기차의 모델, 출발지와 종착지, 앨범이 녹음된 장소와 시간, 당시 날씨 상황등이 상세히 적혀있다는 거다. 재미있는 건 그 설명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이라는 것! 다음은 '천 둥 치는 하늘아래 기관차 여행'의 앨범 설명 중 일부.

"1961년의 대홍수! 성난 하늘은 미시시피의 조그만 마을 하티 스버그를 온 힘을 다해 덮쳤다. 엄청난 폭우로 인해 모든 게 잠 긴 상황. 지지직거리며 타오르는 번개와 대지를 뒤흔드는 천둥 소리를 뚫고 낡은 기관차 No.300의 비명과 같은 기적소리가 들려온다. 번개가 너무 가까이에 있어. 마지막 놈은 겨우 150야 드 옆에 떨어졌다고! 기관사가 낡은 철마의 고삐를 낚아채며 소 리치자 기차는 두 번의 기적소리를 괴물처럼 내지른다... 이 봐.

늙은이. 폭우야. 조심해!"


7. 첫 번째 앨범 재킷 사진을 찍고 마지막 앨범 재킷 사진을 찍을 때까지 총 14개월이 걸렸다. 목표했던 것보다 두 달이 오버 된 거다. 중간에 기차 소리 22연타를 맞고 한동안 슬럼프가 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증기기관차 소리를 들으며 과거를 회상하던, 이제는 죽어버린 자들의 마음을 기웃거려 본 건 특별한 경험이 었다. 계획한 기간 안에 끝내지는 못했지만, 백여든세 장의 LP 를 클리어 한 것 역시 대단했다. 물론 '죽은 노파의 컬렉션'을 다 들었다고 음악에 대한 조예가 엄청 깊어졌다거나 그전보다 더 교양있는 사람이 된거는 아니다. 수십 종의 기차 소리를 오타쿠 처럼 들었지만 엔진소리만으로 기차 모델을 맞추는 고수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성심으로 대할 때 삶이 지루하지 않더라는 것.

그 얘기가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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