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fore the trip
여행자금을 본격적으로 모으기 시작한 때가 2017년 8월이다. 당시 내 수중에는 2만 3천 원이 전부 인 것. 그것이 사실이었다.
2018년 3월 9일에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마감일을 따져보게 되었다. 3월을 제외하고서 8월, 9월, 10월, 11월, 12월, 1월 , 2월 정확히 7개월 하고도 9일 정도가 남았다.
“그래, 나에게는 아직 7개월이 있다” 포기하기엔 아직 일렀다.
속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일의 양 계산해 보았다. 기존에 하고 있던 일뿐만 아니라 주말에 추가적으로 일을 늘리면 한 달에 150만 원이 아니라, 250만 원까지 저축이 가능하겠다는 현실을 파악했다.
그리고 목표를 정했다. 1600~1800만 원 사이로 여행경비를 만들겠다고, 반드시 이루겠다고 다짐하였다. 현실을 확인하고서 8월부터 6개월 동안 한 달에 3가지 정도의 일을 하였고, 주말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매달 2~3번 정도의 휴식을 갖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계획했던 친구들 과의 약속이나 서울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돈을 모으는 방법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우선 고정 항목인 생활비와 보험료, 통신비와 같은 항목들은 예상 지출금액을 만들어서 그 통 장안에서 해결하였다. 또한 개인적인 돈에서는 친구들 과의 만남이라 던 지, 경조사에 쓰이는 부분을 해결하였고, 만일 스스로가 정한 예상 지출금액이 넘어갈 경우, 나는 나의 개인적인 용돈 항목을 줄이기로 하였다.
그렇게 8월~1월까지 6개월 동안 250만 원씩 저축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1500을 모으게 되었다. 또한 2월에는 일을 정리하면서 추가로 200을 더 보태서 1700을 가지고서 여행길에 올랐다.
꽤나 절박했던 것일까?
나에게 찾아왔던 용기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 용기가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더 이상의 많은 제약들이 생기기 전에 모든 것을 멈추고서 떠나고 싶었다.
한 번의 위기가 왔지만, 원래 기회라는 것이 이렇게 상충되는 것과 맞물려 온다면 그 둘을 조화롭게 배치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힘들고 두려웠고 겁이 났다.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말해도 7개월도 더 남은 준비기간 동안 내가 흔들릴 까 봐 난 조마조마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난생처음,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고, 대인기피증 등 1달 동안 인생에서 암흑 같은 시간들을 보냈었다. 사기당했다는 모든 사실들을 인지한 순간 허무하고 허탈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한 번에 사라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는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래서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한 사람의 이야기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때 내 소원이 단 한 명이라도 이러한 트라우마를 극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고, 알았으면 좋겠는 게 소원이었다.
'트라우마라는 것 극복 가능해요, 그거 견뎌낼 수 있어요'와 같은 이런 모호함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무슨 힘든 일을 겪고, 어떻게 극복하였는지를 알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렇게 나는 우선 유튜브로 트라우마에 관련된 영상들을 접하게 되었다. 트라우마에 걸린 사람이 영상을 찍지는 않기 때문에 정신과 전문의 상담을 토대로 나왔던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 중에서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내 마음이 조금은 쉴 수 있는 이야기들에 집중했다.
“머릿속에 생각나는 안 좋은 일들을 종이에 적어 내리기”
머릿속에 둥지를 틀고서 떠나지 않는 안 좋은 이야기를 종이에 토해내는 방법으로 소개된 영상이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책상으로 달려갔고, 바로 보이는 공책과 연필을 챙겼다.
당시 나는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들이 있었고, 대부분 안 좋은 생각들이었다. 이것이 극복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나를 힘겹게 하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분명 끝난 일인데도 나는 과거 속에서 살고 있었고, 그때의 시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되풀이될 것 같은 엄청난 불안과 고통이 온몸을 감싸면서 말이다.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눈물만 흘렀다. 평온해지고 싶었는데 마음속의 소용돌이만 일어났다.
이것이 극복 가능했으면 좋겠는데, 안될 것 같아 거울 속에 내 모습에 대해서 자꾸 의심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상태는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안 좋은 생각들을 억눌러서 없애려고 계속 노력해왔지만 점점 그 힘이 커지는 것 같아 무서웠다.
그래서 그냥 나는 나를 인정했다.
“너 불안한 거 맞아. 아직도 그때 그 시간에서 살고 있는 거 맞아.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돌아와도 괜찮아” 라며 힘들어하는 나의 모습에 동조를 하고 나의 여린 마음과 나약함을 긍정했다. 나와 싸우지 않고, 에너지를 주지 않기로, 불안한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갑자기 큰 일을 겪고서 하루 만에 낫는 것도 정상은 아니겠다 싶었다. 나에게는 조급함을 버리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서 나를 믿기로 시작했다.
그 후에 나는 하루, 이틀, 삼일, 사일 매일 머릿속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안 좋은 생각들을 종이에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어떤 생각이든 상관없었다. 하루에 몇십 장씩 머리에 안 좋은 생각들로 속이 곪아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종이에다가 적기 시작했다.
이 머릿속의 생각을 종이에 적는 방법은 무한도전에 나왔던 '걱정 노트'의 일종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생각이 분노 든, 후회 든, 자책이든 미련이든 상관없었다. 종이에다가 토해낸다는 심정으로 미련 없이 적어보고 이 생각에서 더 이상 구속되지 말고 자유로워지자는 마음가짐으로 적고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는 항상 ‘이제 이 고민으로 나를 괴롭히지 말자. 생각이 다시 떠오르더라도 그 고민들을 컨트롤, 다스릴 수 있다고, 나는 생각의 죄수가 아니다’라고 마지막에 모든 글에다 덧붙여서 적었다.
머리에 드는 모든 생각을 노트에다가 다 쏟아버린다는 느낌으로 계속 반복을 했고, 그렇게 생각이 날 때마다 이 노트를 펴서 작성을 해보았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두 번 또 생각이 나서 나를 괴롭히는 것을 종이에다가 적었고 이번에는 생각 버리기 상자를 만들어서 그 종이를 상자에 넣고 잠거 버렸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을 상자 속으로 털어버리는 이미지 작업을 했던 것이다.
내가 했던 종이에다가 적는 방법은 정신과 치료 중 한 방법이다. 이 방법을 알려준 친구가 했던 말인데, “정신과 치료를 일주일에 한두 번 가면 그때마다 준 쪽지에 생각을 써오라고 한 대. 그리고는 그거를 들어주고 자기 이름으로 된 상자에 넣는 대 계속 반복하고 또 만날 때마다 그 생각들을 보고! 그러면 생각들이 반복되고 똑같은 것들이 있고 그걸 이제 지각하면서 “예전에 이랬었구나” 이렇게 되면서 생각을 머릿속에서 상자 속으로 털어내 버리는 거래.”라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시간이 약이다 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매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언제쯤 정상적 이어질 수 있을까?’ ‘언제쯤 일상생활이 가능해질까?’ 이러면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 그 노력이 없으면 시간은 약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다시 마음을 잡기까지는 최소 한 달, 나의 노력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더해져서, 조금씩 조금씩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 상태로 돈을 버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해보고 싶었다.
화상으로 아이들의 영어를 가르쳤다. 10분씩 화상수업을 하는데 하루에 40명 정도씩 일주일에 대략 200명이 조금 넘는 아이들의 화상수업을 진행하였다. 매일 1시부터 10시까지 헤드폰을 끼다 보니, 귀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했고, 목이 쉬는 일도 빈번했다. 그리고 주말에 강연과 답사 등 다른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1700만 원은 7개월 동안 그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다시 내 손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많은 돈을 벌지는 않았다. 저축을 하기에 충분한 돈을 벌었지만 쓰기에 충분한 돈을 번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꽤나 숨 가쁘게 달려왔다.
나에게 휴식을 준다는 느낌은 거의 없던 순간들이었지만 가끔씩 나는 나만의 케렌시아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서울에 있는 경희궁이나 종묘와 같은 곳을 가보니, 내가 숨 쉴 수 있는 나만의 장소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간에 쌓였던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어느 정도 해소와 동시에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나만의 장소인, 케렌시아들을 일을 하면서 더 깊게 더 다양하게 마주 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서울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