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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Dec 01. 2021

마음에 쓴 이름

첫사랑! 나를 사랑해 준, 내가 사랑한 최초의 타인


  매달 첫 주 수요일엔 신간 그림책을 둘러보러 서점에 간다. 그림책 매대를 살펴보다 황선미 작가와 김동성 그림작가의 신간 <소꿉놀이가 끝나면> 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하는 작가님들의 콜라보 작품이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 냉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김동성 작가님의 서정적인 그림에 흠뻑 젖고 황선미 작가님의 날카로운 필력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감상했다.  여섯 살 주인공 소녀가 주체가 되어 소꿉놀이 세상을 창조하고 절정으로 치달을 때 멈춰 설 수밖에 없는 유년기의 한 시절을 담아낸 이야기가 애틋하게 펼쳐진다. 그림책에 빠져 보는 동안 나는 어느새 주인공 소녀처럼 내 유년기의 그리운 소년을 만나고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8살의 나는 술래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엄마가 대충 자른 단발머리, 술을 드시면 마을 입구부터 시끄럽던 아버지의 주사, 양옥집들이 즐비한 마을을 지나 한참을 더 올라야 있는 고개 마루 우리 집의 초라함도 놀이에 집중하는 시간에는 달아났다. 오로지 잡히지 말아야지 그 생각으로 짧은 머리 나풀거리며 내달리던 내 허리를 꽉 끌어안던 소년.  

 "잡았다!"

 팡 터지는 스프링클러의 상쾌함을 닮은 그 아이의 웃음소리. 하얀 얼굴에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입가에 마르지 않는 웃음을 매단 소년을 돌아보며 내 얼굴은 붉어졌다.


  1학년 짝꿍인 소년은 술래잡기만 하면 나를 잡고, 맛있는 게 있으면 내게 주고, 장기자랑 시간엔 나를 지목했다. 부끄러운 마음에 도망 다니면 쫓아오고 아랫마을, 윗마을에 살아 등하굣길에 자주 마주쳤다. 아침마다 학교 가는 것이 부담스럽던 어린 나에게 소년의 관심과 애정은 자석처럼 학교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소년과 친해질수록 걱정도 쌓였다. 연못이 있는 정원과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는 친구의 양옥집은 방한 칸 전세살이 우리 집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 주는 듯했다. 때로 커다란 양은 주전자를 들고 아버지 탁주 심부름을 가는 날에는 소년을 만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남에게 보이기 초라한 우리 집 모습이 내 모습인 듯 주눅 들어 소년의 존재가 좋으면서 불편했다.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 한낮 눈앞에 날아드는  벌과 높이 자란 개망초 꽃을 헤치며 걸어가는 내 얼굴은 땀범벅이 되었다. 하굣길 소년은 고집스럽게 내 뒤를 쫓았다. 따돌리려고 큰길을 벗어나 들길을 택했는데도 오늘은 기어코 우리 집을 알아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당황하고 분했다. 풀꽃들을 거칠게 헤치며 앞으로 내달렸다. 같이 내달린 소년은 힘껏 내 가방을 낚아챘다. 울음이 차오르는 마음을 누르며 나는 고 있던 가방을 휙 벗어버렸다. 잡아당기던 힘에 밀려 친구는 흙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무렇게나 떨어져 앉은 내 가방과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친구를 보니 참았던 울음이 왈칵 터졌다. ‘나도 너를 집에 데리고 갈 만큼 잘 살았으면 좋겠어! 누군 데려가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알아!’ 입으로 터져 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물론 집은 아니었다. 절대 우리 집은 보여줄 수 없는 비밀. 소년이 간직한 호감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안타깝고 두려운 마음이 담긴 달음박질이었다.         


 그 뒷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가방을 되찾았는지, 그 소년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상대적으로 초라한 우리 집이 심어준 부끄러움과 그저 친구 집이 궁금했을 뿐인데 매몰차게 내쳐 상처를 주었나 하는 미안함이 어린 내 마음을 헤집어 놓았고 그 상처는 기억을 지워버렸다.  소년은 얼마 뒤 서울로 전학을 갔다. 그날 일이 부끄럽고 불편하여 제대로 배웅도 하지 못한 채 소년을 가슴에 묻었다.  




 지금도 가끔 그 소년이 생각난다. 그 시절은 아득히 멀게 느껴지지만, 기억의 나이테 속 깊은 골 안에 소년의 이름은 팔딱이고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왜 소년의 이름을 이토록 집요하게 기억하려 드는가?'


 세상을 곁눈질하며 나와 견주어보던 어린 시절, 원치 않는 현실이 주는 실망감 속에 구겨지던 마음은 뽀얀 얼굴로 나를 보고 웃던 소년을 떠올리면 조금씩 펴졌다.  목이 꺾이게 높아만 보이던 세상에 움츠러 나약한 아이가 붙들어야 했던 믿음의 끈 한 자락. '이쁘다' , '사랑스럽다' , '세상은 너에게 호감을 보인다.' 이 메시지가 나에게 필요했고, 나는 끊임없이 소년의 기억을 펌프질 하며 이 말들을 길어 올렸다.


지금 어딘가에서 나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같은 바람을 맞으며 살고 있을 소년에게 나의 이름은 이미 사라졌겠지만, 그의 이름은 나에게 남아 지금도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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