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종영한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을 정주행 했다. 조선의 '중흥군주 정조 이산'을 다룬 미디어는 차고 넘치게 많다. 그가 평생 사랑한 여인 의빈 성씨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있던 터라 방송 중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우연히 YouTube에서 '시경(詩經) 북풍(北風)' 편이 나오는 짤을 보곤 배우들의 연기와 분위기가 좋아 빠져들었다. 전편을 몰아보느라 힘든 한 주였지만여운이 오래갔다.
처음엔 기존 사극에 학습된 뇌가 정조라는 인물이 지닌 거대한 스토리의 힘과 고난을 헤치며 궁녀 덕임이가 승은을 입게 되는 과정을 재미있게 다룬 이야기 정도일 거라 짐작하게 했다. 크게 다르진 않지만, 시점을 궁녀 덕임이로 집중하니 미세하게 결이 달랐다. 이 드라마의 긴장감 있는 서사 구조는 오히려 배경이 되고 줄곧 덕임의 마음에 공명하며 여성이며 한 인간인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에 초점을 맞춰 몰입하게 했다.
"궁녀에게도 스스로의 마음이 있고, 의지가 있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 > 중
조선시대 궁녀는 왕의 여인이다. 분명한 신분 제약이 있는데 이 여인은 어찌 이리 당차게 왕의 청을 거절한단 말인가! 아니 이것이 가능한 시대인가? 그러나 정조가 남겨놓은 <어제의빈묘지명>과 <제문>, 궁안의 이러저러한 일들을 기록한 <이재난고> 등에는 그녀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녀를 특별히 아꼈던 정조는 열다섯 세손 시절부터 그녀에게 구애를 한다. 그러나 덕임은 거절하고 15년이 지나 왕이 된 정조의 구애를 또다시 거절한다. 왕을 향한 거절은 곧 목숨 값으로 돌아올 수도 있는데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은 그녀가 왕족이 되기가 죽기보다 싫었거나 자기주장을 해도 무방한 정조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덕임인 궁녀라는 운명적 굴레에도 불구하고 자기다움을 지키는 주체적인 존재로 살기를 꿈꿨던 조선의 몇 안 되는 여성이었지 싶다. 그러나 정조의 사랑은 결국 그녀로 하여금 승은을 받아들이게 한다.(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상상력이 가미된 이야기의 특성상 드라마의 인물들은 그러하다)
덕임이 스스로 왕실 가족이 되어 한 남자의 지순한 사랑을 받으며 행복했다로 끝났다면 말 그대로 로맨틱 사극 드라마였겠지만, 빈이 된 이후 왕의 여자라는 성 역할에 갇힐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여성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잦은 임신과 유산을 거듭하며 불안하고 우울한 나날을 지낸다.(드라마에선 유산 장면은 없지만, 그런 기록이 남아 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아 세자의 어머니로 빈이 되고, 정조는 직접 의빈이란 칭호를 내려준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 어린 딸과 세자를 한꺼번에 잃는 가슴 아픈 일을 겪으며 심신이 약해진 그녀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세상을 떠난다. 정조가너무나 사랑했던 그녀와 아이들이 한 시절 꽃처럼 피었다 속절없이 흩어졌다.(정조와 가정을 꾸리고 채 6년을 함께하지 못했다.) 정조는 칼로 베이듯 애통한 마음을 직접 글로 남겼는데, 이 엄청난 비극을 글로 풀어내지 않고는 숨 쉴 수 없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그 시절 의빈 성씨를 만나고 있다.
이 드라마는 남성을 통해 여주인공이 신분상승을 이루는 신데렐라식 접근이 아니라, 궁녀의 신분임에도 주체적인 삶을 지키려 노력했던 덕임을 그리고 있어 좋았다. 그러나 살벌한 궁중 생활, 한 남자의 아내,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감당하기엔 매서운 현실 앞에 봄날 목련처럼 져버린 그녀의 삶이 안타까웠다. 만약 그녀가 끝끝내 정조의 승은을 거절하고 궁녀로 살았다면 더 행복했을까? 이미 다급하고 다급한 그의 사랑을, 그가 내미는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들이닥칠 쓸쓸함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듯하다. 그렇다면그녀가 진정 행복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녀가 현대의 여성이었다면 결말이 좀 달랐을까?
최근 페미니즘에 관한 책 모임을 시작해 관련 도서들을 읽고 이야기 나눔을 하고 있어서 이런 생각이 더 든 듯하다. 사실 난 항상 바쁜 워킹맘 밑에서 자라다 보니 전업주부로 살기를 원했다. 일하는 엄마가 해줄 수 없음을 알기에 스스로 포기했던 것들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해주고 싶었다. 즉 비 오는 날 아이 학교 앞에서 우산 들고 기다려주기, 하교한 아이들에게 맛있는 간식 만들어주기, 운동회나 소풍 따라가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부랴부랴 퇴근한 엄마가 온갖 집안일을 이어해야 하는 현실은 어린 내 눈에도 불합리한 일처럼 보였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전업 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전업주부의 삶도 만만치 않았다. 온종일 머무는 집이 직장이 된 느낌. 아이가 태어나니 일은 두세 배로 늘어나고 몸은 너무나 고달팠다. 그리고 아이 키우는 일은 몸만 힘든 것이 아니라 정신도 힘들었다. 이 상태에서 집안일과 직장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면 이건 분명 여성에게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살다 간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여성들이 병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가끔 모임에 가면 나는 웬만하면 남녀 성역할에 맞게,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하는 여성은 전업주부인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하는 길이며, 그것에 당당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나의 생각이 편협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여성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다양한 가치와 삶의 철학, 취향,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육아만큼 소중할 수도 있고,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비혼을 선택하는 여성, 모 방송인처럼 아내 대신 엄마만의 삶을 사는 여성들도 있다. 물론 남성들도 자기 삶의 선택에 있어 자유로움이 존중받아야 함은 마찬가지다.그리고 내가 택한 삶이 나 혼자가 아닌 우리라는관계로 확장되었다면그저 관습화 된 룰을 의심 없이 따를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맞는 창의적인 생활방식을 세워가야 하지 않을까.남녀 성 역할을 떠나 인간대 인간으로 서로의 욕구가 인정되고 불균형 없이 적절한 지점을 찾아내는 유연한 관계들이 형성된다면 우리는 삶이 주는 풍요로움을 조금 더 맛보며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극 드라마 여주를 보며 페미니즘을 떠올리게 되다니! 이러니 신선할 밖에.
조선이라는 엄격한 남성 중심의 계급사회에서 나다움의 행복을 지키려 했던 궁녀가 있었고,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준 왕이 있었다. 그리고 그 존중의 바탕이 지극한 사랑이었기에거대하고 견고한 관습의 거푸집으로 들어가는 불행을 예감하고도 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마음이 나를 흔든다.
죽음을 앞둔 정조의 상상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두 남녀는 현실의 벽 앞에서 그 누구도 온전히 행복하지 않았음에 슬펐다.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이서로에게 덜 미안하기 위해, 나로 온전히 더 행복하기 위해 어떤 오늘을 살아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