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소에서 느꼈던 리더에 관한 생각들 with 케이프타운
별로 나서거나 뽐내거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닌 조용한 스타일의 나는 남 앞에 나서는 일이 별로 없는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삶은 늘 그렇듯 내가 예상하는 나의 모습과는 다르게, 누군가의 앞에서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을 전하고, 작다면 작지만 어찌 보면 20명 이상으로 구성된 조직을 이끌고 책임을 지는 자리에 서게 하기도 한다.
해외사무소에서 나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직의 모든 걸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리더십에 관한 고민을 꽤 오랫동안 했던 것 같다.
1. 발화의 순서
처음 부임했을 때 리더라는 자리에 대해서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늘 그렇게 했던 것처럼 직원들과 함께 이슈에 대해 토론을 하면 적극적으로 내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반대되는 의견이 있으면 생각나는 데로 이야기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순간, 논의는 종결되고 아무도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유는 내가 소장이기 때문이었다.
일에는 늘 다양한 갈림길이 있고,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가능한 다양한 의견을 듣고 좀 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길, 피해가 적은 길을 찾아가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다. 그런데 리더가 말 한마디를 하면 종료되는 회의는 그런 가능성을 무척 제한한다고 느꼈다.
깨닫고 난 이후부터는 늘 나의 의견은 가능한 마지막에 이야기했다. 확실한 방향으로 생각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먼저 요구했다. 회사생활의 경력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많은 경우 동료들의 의견은 고려의 폭이 좁은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여러 의견을 듣고 내 의견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사람은 고민하고 생각하기를 싫어해서 그냥 빨리 내 의견이 뭔지 확인하고 그대로 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 내 의견을 이야기하지 않고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내놓기를 요구했다. 그게 습관이 되는 것이 나에게도 좋고 그에게도 좋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다른 공간에서 다시 리더의 역할을 맡게 된다면 계속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걸리고 귀찮기도 한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조직의 문화는 자유로운 소통에서 온다고 믿고 있고 이를 위해서는 리더가 모든 의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동료들은 무슨 의견이든 제시할 자세가 되어 있고, 자유롭게 의견 개진을 하는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리더가 쉽게 의견을 먼저 제시하지 말아야 한다.
2. 업무의 분장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중의 하나는 업무분장을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몇 개월에 한 번씩 드나드니, 그때마다 업무분장을 다시 해야 한다. 사람들의 관심사도 다르고, 업무 역할의 범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관심사에 따라서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일을 많이 하지 않는 걸 핵심 가치로 했다. 사람 간 일의 배분을 양을 가지고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그때 떨어지는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업무의 경중과 업무부담을 고려해서 배분했다. 그러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는 지금 어떤 직원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내가 정말 가장 싫어하는, 되고 싶지 않은 리더는 지금 직원이 뭘 하고 있는지, 뭐가 고민인지 잘 파악하지 못하고 매일매일 떨어지는 일들을 기계적으로 빨리 직원에게 넘기고 자기는 손 탁탁 털면서 일끝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3. 업무의 시간
나의 모토는 가능한 '야근하지 않는다'이다. 나부터 야근하지 않았고, 직원들 대부분 야근하지 않았다. 야근한다는 직원에게는 왜 하는지 가능하면 물어보려고 했다.
야근 관련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뉴스 기사가 있다. 미국에서는 직원이 야근을 많이 하면 상사를 해고하거나, 직원을 해고한다는 것이었다. 상사가 업무 배분을 비효율적으로 했거나, 직원이 실력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깊이 감동했고 늘 되새기고 있다.
가장 짜증 나는 일은, 본부에서 우리 사무소의 직원에게 직접 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이었다. 부서와 부서의 협조는 가능한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내가 직원들이 뭘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중요한 일은 같이 파악하고 고민하지만, 그때그때 사소하거나 급한 일들을 본부에서 수시로 사무소 직원들에게 요구하면 나는 뭘 하고 있는지 파악을 못하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협조도 못한다.
게다가 논의 과정에서 이거 본부에서 이렇게 하래요 라고 하면 참 할 말이 없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그 업무는 필요 없는데!라고 하고 싶지만 본부에서 요구하니 어쩔 수 없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향이 점점 확대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무소의 업무를 본부에 종속시키고, 사무소 자체적으로 일을 체계적으로 할 수 없게 만든다. 사무소가 협동해서 팀으로서 일하지 못하게 한다.
4. 책임의 범위
책임은 온전히 리더의 몫이다. 잘한 건 함께 즐거워하고 대외적으로 잘못한 것은 리더가 책임져야 한다. 감사를 받으면서 내가 몰랐던 일이라도 내가 책임지고 확인서에 사인하는 것이 맞다. 권한이 있는 자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권한은 행사하고 싶지만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 회사의 많은 부서의 행동을 보면 권한은 행사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의무를 잔뜩 부과하고 지키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 점수를 깎겠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화가 나는 경우가 많았다. 본부에서 사무소에 일을 시키지만 그 일의 책임은 지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책임질 일이 있으면 관련된 결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거면 일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일하면서 외부의 많은 공격을 받았다. 우리 사무소의 직원을 비난하기도 했고, 사생활을 언급하기도 했다. 일이 잘못되었다고 욕도 들었고,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런 일들로 직원들에게 과도한 책임을 묻거나 책임을 전가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참 괴로웠다. 책임을 온전히 감수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괴로움이 스스로를 해치는 것 같을 때는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우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5. 내가 책임질게!
함께 했던 리더 중에서 내가 좋아했던 그분은 이런 말을 하셨다. 내가 주장이 강해서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하는 거라 말씀드리면 생각이 다르셨던 그분의 마지막 한 방은 '박 과장 내가 책임질게 내 말대로 하자'였다. 그 말씀을 들으면 나는 알겠습니다 하고 순종했다. 그 말의 힘이 정말 강력했다. 나는 규정과 원칙 등등을 거론하면서 어떤 방안을 말씀드렸는데 그분은 더 큰 맥락과 조직의 역사와 방향을 생각하면서 다른 의견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누군가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말은 그분 말고는 들은 적이 없었다. 늘 본인이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어디에 물어봐, 더 알아봐라고 이야기하고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위원회를 만들고 위원회가 결정하게 한다.
나는 내가 책임지는 리더가 되고 싶었다. 내가 책임질게 라고 말하는 리더가 되고 싶다.
6.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일을 커트해야 한다. 프로페셔널은 뺄셈을 잘하고, 아마추어는 덧셈을 잘한다.
예전에 어떤 부서장이 본인의 역할을 윗사람들과 잘 소통해서 그분들의 의사를 확인하고 직원들에게 잘 전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뜨악했었다. 중간관리자로서 부서장의 역할은 조직의 미션을 위해 정해진 부서의 고유한 업무를 잘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생각 없이 내려오는 이상한 일들을 최대한 막아내고, 아래로는 직원들이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독려하면서도 쓸데없는 일을 최소화시키는 데 있다.
특히 열의 있는 혹은 엉뚱한 직원들이 가지고 오는 아이디어들이 왜 어려운지 아니면 왜 비효율적인지 혹은 시도해볼 만한지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걸러줘야 한다. 그래야 리더와 직원 모두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조직에서 직원이 새로운 일을 들고 오는 경우는 잘 없다. 가만히 있어도 위에서 뭘 자꾸 시키는 조직에서는 특히 그렇다. 직원이 새롭게 아이디어를 내서 하는 일은 관심이 없고 윗사람이 시킨 일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은 현실의 손과 발에 머리가 따로 논다. 그래서 손발은 고생하지만 성과는 별로이게 된다.
난 리더는 뺄셈을 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일은 하면 안 돼, 왜냐면 성과가 나오지 않아, 비효율적이야 이런 말을 해줘야 한다. 리더가 일을 만들어서 아래로 뿌리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 일이 올라오게 해야 한다. 조직의 리더들은 보통 뺄셈을 못한다.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원래 하던 일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도 하고, 하던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문제를 다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뺄셈을 못한다.
하지만 덧셈은 잘한다. 원래 하던 일 다 하고, 내가 새로 하고 싶은 걸 시킨다. 새로운 일은 새로 했으니 폼이 나고 홍보도 열심히 할 수 있고 결과는 한참 나중에 나오니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나는 여기에 없다. 그래서 열심히 덧셈을 한다. 일을 더하고 일을 더한다. 새로운 사람이 오면 기존 리더가 새로 벌린 일도 계속하고 새로운 리더가 벌리는 일도 계속한다.
난 정말 일을 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참 어려워서 가능하면 핵심 업무가 아니면 일을 새로 하지 않으려고 했다.
7. 도서관리 프로그램이 꼭 필요한 걸까?
예를 들면 본부에서 전 사무소에 조사를 했다. 도서관리 프로그램을 컴퓨터와 함께 제공해 줄 테니 원하면 신청하라는 거였다. 나는 신청하지 않았다.
본부는 사무소에 1년에 한 번씩 책을 백 권쯤 보내준다. 그래서 사무소마다 한편에 책장을 마련하고 사무소 직원들과 봉사단원들이 빌려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도서관처럼 책에 하나하나 라벨을 붙이고 컴퓨터로 관리하면 편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부가되는 업무가 너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무소에 와서 책을 빌리는 사람 중에 특정 책을 보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찬찬히 둘러보면서 뭔가 눈에 띄는 책을 찾는 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분실의 위험도 크지 않다.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갈 때 짐을 줄이려고 기부하고 간다. 만약 누군가 어떤 책이 정말 너무 좋아서 갖고 싶어 한다고 하면 가져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역설적으로 그 정도로 책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라면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더 그렇게 생각했다.
도서관처럼 책이 특정한 위치에 제자리에 놓여있도록 관리하는 것은 너무 행정 소요가 많은 일이라 불가능하고, 분실의 위험도 없고 원하는 책을 찾는 것도 엄격하게 할 필요가 없는데 도서관리 프로그램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신청하지 않았다. 나중에 듣고 보니 전 사무소 중에 우리 사무소만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더 후에 듣기로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해서 도서관 사서 출신 단원이 이것은 전문가들이 사용해야 하는 시스템이라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기엔 너무 어렵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떤 시스템 도입과 활용을 위해서 많은 행정력이 동원되는 업무가 들인 노력만큼의 가성비가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도서관리 프로그램을 도입하지 않은 것을 나 혼자만의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8. 문제에 대한 대안의 첫 번째는 status quo
십몇 년 전에 정책학 원론 수업을 들을 때 첫 시간에 들은 내용이 너무 강렬해서 아직도 기억한다. 정책 대안의 첫 번째는 언제나 동일하다. status quo이다. 정책 대안의 첫 번째는 현상유지라는 말이다. 변화가 가져오는 기대효과에 비해서 변화에 따른 부작용이 클 수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늘 그런 태도로 살았다. 충분히 고민하고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실패한다. 노력하고 보람도 없다.
리더는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늘 status quo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볼 때, 주변에서 볼 때 소극적으로 보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 특히, 조직에서 겉으로 멋진 척 늘 해결방안을 척척 이야기하는 척하지만 나중에 문제 생기고 발뺌하고 해결은 다른 사람이 하게 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았다.
9. 권위적이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권위는 있어야 한다.
10여 년 전 처음 해외사무소 부임하기 전 교육을 받으면서 인사실장님은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두 가지가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하나는 이성 직원과 단둘이 있지 말아라. 두 번째는 권위적이지 않아야 하지만 권위는 있어야 한다. 권위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태도에 관한 말이고, 권위는 일에 하는 능력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도는 부드럽고 열려있으면서 항상 상대방의 말을 존중해야 한다. 일하면서 가끔씩 함께 일하는 직원이 조금 건방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조금 선을 넘는 것 같다는 태도를 보일 때가 있어 고민이 되었는데, 선을 심하게 넘는 게 아니라면 내가 인정하고 넘어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자기 생각을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게 솔직한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일을 잘해야 한다. 일을 잘하는 것을 통해서 직원들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직원들의 신뢰가 무너지면 말의 힘이 없어지고, 그러면 태도가 권위적이 되기 쉽다. 꽤 많은 사람들이 반대로 한다. 능력으로 얻은 신뢰와 권위보다는 권위적 태도에서 오는 순종을 요구한다.
10. 마지막
리더는 한 발 물러설 줄 알고 최대한 직원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고, 자신과 직원들의 일 모두에 책임을 지면서 불필요하거나 부차적인 일을 만들지 않는 사람. 핵심에 집중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태도는 부드럽고 유연하면서도 말에는 힘이 있는 사람.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