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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Dec 18. 2018

'새'가 '혼수상태'가 된 이유

민박집주인의 뉴욕 이야기(1) 

프랑스 작가 폴 오스터는 뉴욕에 살면서 <뉴욕 3부작>을 비롯해 가장 사랑스럽게 뉴욕을 묘사하는 작가다. 그의 소설 <달의 궁전> 앞부분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엘리스섬에 비치되어 있는 승선자 리스트


"... 나는 마르코 포그였고, 어머니는 에밀리 포그, 그리고 시카고에 있는 외삼촌은 빅터 포그였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포그였지만, 내게는 한 집안사람들의 성이 모두 같다는 게 의당 그래야 하는 일로 보였다. 나중에 나는 빅터 삼촌에게서 외할아버지의 성이 원래는 포겔만이었지만 엘리스 섬에 있던 이민국의 어떤 직원이 안개라는 뜻을 지닌 포그 Fog로 줄였고, 1907년에 'g'자가 하나 더 붙기까지 그것이 성으로 쓰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외삼촌이 내게 알려준 대로라면 포겔은 새라는 뜻이었는데, 나는 내 이름자에 새가 들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내 조상들 중에서 누군가 뛰어난 사람은 실제로 날 수 있었을 거라는 상상도 해보았다. 나는 늘 안개를 헤치고 나는 새, 미국에 이를 때까지 쉬지 않고 대양을 가로질러 나는 거대한 새를 생각하곤 했다.."

<달의 궁전> 열린 책들

엘리스 섬에 처음 발을 디딘 초기 이민자들 (국립 이민 박물관) 

우리 식으로 '멍한 혼수상태'란 뜻의 Fogg를 패밀리 네임으로 갖고 살아야 했던 어린 마르코. 삼촌이 얘기해준 이야기는 마르코가 고단한 학교 생활을 견디게 하는 힘이 돼 주었다. '나는 원래 새였어. 저 먼 유럽에서 고귀하게 날아 올라 대서양을 가로질러 날아온 거대한 한 마리 새!'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주인공 마르코의 소심한 뉴욕 생활의 시작이 된 이름의 그 사연은 반문맹이었던 어느 말단 공무원의 보잘것없는 실수 때문이었다. 이어폰 너머로 마르코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듣던 그때, 나는 마침 자전거를 타고 엘리스 섬(Ellis Island)을 따라 달리는 중이었다. 허드슨 강 안에 자리 잡은 저 조그만 섬은 유럽에서 넘어온 가난한 마르코의 외할아버지 같은 이들이 제일 먼저 발을 디딘 첫. 번. 째 미국이었다. 모든 재산을 털어 미국행 배에 오른 그들은 멀미와 불결함, 복잡함과 무질서를 견디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맨 처음 만난 미국인들은 몇 년 먼저 이 땅에 도착해 완장을 찬 이들었을 것이다. 새로 입항하는 이민자들의 생사 여탈권을 쥔 그들은 꽤 거들먹거렸을 것 같다. 


유럽에서 출항한 배가 엘리스 섬에 도착하면 승객은 두 부류 나뉜다. 배 안에서 이민국 직원들을 만나는 1, 2등 객실의 손님, 그리고 모든 짐을 들고 하선해 가비지 룸에 맡기고는 2층으로 올라가 긴 줄에 서 입국 심사를 기다리던 3, 4등급 객실의 승객들이다. 그것은 영화 <타이타닉>에서 케이스 윈슬렛이 속한 그룹과 디카프리오가 숨어 지내던 지하 객실의 차이였다. 

엘리스 섬 선착장에서 본 초기 이민 사무소 입구. 현 미국 인구 1/3의 조상이 이 곳 엘리스 섬을 거쳤다.  


배에 오를 때 적어낸 선승자 리스트는 미국 입국 시 본인 확인을 위한 최초의 신분증이 되었다. 아일랜드, 러시아, 폴란드,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등 모두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었다. 문맹률과 비례하는 가난한 이들 중에는 자기 이름을 쓸 수 없는 이가 태반이었다. 간신히 적은 이름도 생전 처음 들어본 발음과 스펠링으로 말단 공무원을 곤란하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여러 번 되묻는 관리에게 그냥 미국식으로 편하게 바꿔달라 부탁하기도 했다. 현 미국인들 조상의 1/3인 1천5십만 명이 입국심사를 받았다는 엘리스 섬을 거치면서 수많은 이름들이 바뀌고 우스워지고 달라졌던 이유다. 엘리스 섬에 가 귀를 기울이면 마르코 포겔이 마르코 포그가 된 것 같은 수많은 사연들이 돌담 하나하나 계단 사이사이에서 소곤대고 있을 것 같다. 


".. 이름은 놀림감으로 삼기에 가장 쉬운 것인 데다 포그라는 성은 갖가지 별명들을 제멋대로 갖다 붙이기에 적합한 것이어서 패그 fag(똘마니)니 프로그 frog(개구리)니 하는 별명 외에도 날씨와 관련된 놀리는 말이 수 없이 생겨났다.."<달의 궁전> 열린 책들


마르코의 사연을 읽다 보니 내 초등학교 베프 송지현은 어디서 뭘 하며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젠 송충이 같은 촌스런 별명으로 부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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