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세대는 10대 혹은 20대 초중반 청소년들을 보며 '요즘 애들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성세대로 갓 진입하고 있는 현재의 40대는 20여 년 전 'X세대'라고 불렸습니다. '규정할 수 없는 세대,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세대'라는 의미였죠. 말이 좋아서 자유분방한 세대지, 그때도 기성세대는 혀를 끌끌 차며 '제멋대로 구는 싸가지 없는 놈들'이라며 10대와 20대를 손가락질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이런 현상은 반복될 것입니다.
단, 다른 부분은 몰라도 감수성과 개인 존중 측면에서는 세대가 지날수록 진보를 거듭한다고 봅니다. 손가락질받았던 X세대의 자유분방함이 지금은 당연한 것이며, 존중해야 할 가치로 새겨지고 있습니다. 지금 버릇없다고 얘기하는 10대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패턴이 10~20년 후에는 당연한 것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성인지 감수성도 마찬가지입니다. 20~30년 전만 해도 많은 남성들이 부하 여직원에 대한 성희롱을 당연한 듯 저질렀고, 여성들은 참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분위기가 아주 달라졌죠. 새로운 세대가 기성세대로 진입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감수성의 진보를 가져온 겁니다.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중세시대엔 노예를 사고팔던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는 노비 제도가 있었죠. 그 시대엔 그게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현 시대에서 바라보자면 야만적인 사람들일 뿐이죠. 우린 지금 노예를 사고팔지 않습니다.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진보했기 때문이죠.
16세기에 영국을 뒤흔들었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어떨까요? 이상향의 사회를 꿈꾸며 집필한 유토피아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이 동등한 교육을 시키자면서도 '가부장제'를 권장합니다. 특히 가족의 통제권은 무조건 '남성 최고 연장자'가 가져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지금 시대에 이런 얘기를 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토마스 모어가 살던 시대엔 이마저도 파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여성들에겐 교육의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덧붙이자면, 지금의 기성세대는 중고등학교 시절 군사정권 문화 속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빠따'도 맞고, 교실 바닥에 머리를 박는 기합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난무했었죠. 그런 행동을 했던 교사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곧 그 시절의 학교 분위기는 야만적이었다고 기록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야만'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과거에는 '당연한 것'들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먼 미래에는 '야만'으로 불릴 것입니다. 야만을 알아차리는 진보는 가만히 있는다고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지적하고 행동하는 누군가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모든 역사가, 모든 세대교체가 진보를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반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나치즘이 그렇고 파시즘이 그랬었죠. 그런 반동은 경계하되, 다음 세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기성세대보다는 진화된 감수성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문명은 먼 미래의 야만일 뿐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야만인입니다.
이 글은 지난 8월 초 ‘해피엔딩 좀 쓰면 안 돼요?’ 출간 북토크에서 얘기했던 내용 일부를 재정리한 것입니다.
참석자 중 한 명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책 내용이 전반적으로 기성 질서를 신경 쓰지 말라는 것 같은데, 세대 간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선은 필요하지 않느냐?”
이에 대해 작은 논쟁이 오갔습니다. 그날은 준비되지 않은 답을 하느라 다소 두서없이 얘기한 것 같습니다. 이 글이 이해를 도와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