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휴찬 Sep 08. 2020

‘늦은 나이’ 콤플렉스

극단 신입 단원을 모집하면 다양한 사람들이 지원서를 보낸다. 부모님이 연기학원 다니는 걸 허락하지 않아서 몰래 연기를 배우고 싶다는 고등학생의 사연도 보았고, 어릴 때부터 막연한 동경심을 가졌지만, 용기가 없어 못 해봤다는 30대 후반 공무원도 있었다.


그들의 지원동기를 읽다 보면, 스무 살 대학생부터 30대 후반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공통으로 많이 얘기하는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있었다.


“연기를 시작하기엔 조금 늦은 나이라고 생각하지만...”


30대는 어느 정도 수긍한다고 쳐도, 도대체 20대 초반 청년들이 이런 조바심을 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연기하기에 ‘늦은 나이’란 성립할 수 없는 조건이다. 연기자들은 아역부터 80대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대에 걸쳐 활동하고 있다. 다만 중장년 이후에 연기를 완전히 새롭게 시작한 케이스가 드물 뿐이다.


아마도 그들은 연기자로 성공하기 위한 시간과 조건을 따졌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20대나 30대 초반 정도에 정상급 연기자로 자리매김하는 포부를 가졌을 것이다. TV나 스크린에서 보는 유명 배우들이 그 나이 즈음에 스타로 올라서는 걸 자주 봤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인기 많은 아이돌급 배우가 되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지만...’ (물론 20대 지원자라면 이것 또한 늦은 것은 아니다.)


그들이 ‘늦은 나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성공’이라는 굴레 안에서 도전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의 시선 탓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늘 조급하게 ‘성공’을 원하고, 나이가 들기 전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부여한다. 나의 경우, 고등학교 시절에 밴드 뮤지션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현실적으로 바로 실행할 순 없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유로워지면 그때 도전해 봐야지’라는 막연한 희망 사항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한 친구가 내게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넌 이미 늦은 거야. 요즘은 다 중학생 때부터 기획사 들어가서 연습하고 데뷔하잖아. 그래도 뜰까 말까 하는데.”


이렇듯 우린 어린 시절부터 사회적 성공의 굴레에 갇혀 ‘나이가 들었고 이미 늦었다’는 괴상한 나이 콤플렉스에 시달려 왔다. 20대만 되어도 ‘나잇값 좀 하자’며 독특한 시도를 폄하하고, 30대가 되면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말하며, 40대쯤 되면 ‘이제 다른 일을 찾는 건 어려운 나이’라며 새로운 도전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외모만큼은 어려 보인단 소리를 듣고 싶어 너도나도 ‘동안’임을 역설하는 모습은, 그래서 더 서글프다.


그 근원이 어디인지는 콕 집어 얘기하기 힘들지만, 세상은 이렇듯 연령대를 막론하고 ‘이미 늦었다’는 조바심과 두려움을 심어놓고 있다. 이미 늦었으니 낙오되기 전에 빨리 숨으라고, 빨리 피하라고 서로 격려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남들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런데 한편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50대는 ‘내가 40대만 됐어도’라고 한탄하고, 어떤 70대는 ‘1년만 젊었어도’라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어느 날은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은 분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는 이제 80이 넘었고, 형씨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전 올해 75세입니다.”

“어이쿠, 한창 좋을 때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현재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다.



작가의 이전글 부정적인 감정의 필요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