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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영신 Apr 07. 2023

간단 살림#1.냉장고 비워내는 이야기.

나를 직면하는 시원한 방법.

냉장고를 비워내는 일은 안팎으로 시원하다.

냉장고를 여닫으며 시원하고 속도 시원하고!


대대적 냉장고청소를 자주 할 일은 없는데

냉장고를 자주 청소하는 편이기도 하고 냉장고 안 음식도 아주 착실하게 싹싹 먹는 편이라 많이 지저분해질일이없다.

고추장이 많으면 고기를 좀 사다가 고기고추장을 만들고

만두가 몇 알 남지 않았으면 떡볶이에 곁들일 튀김만두를 하거나 칼로리가 걱정될 때에는 알배추와 여러 쪄먹을 만한 야채와 함께 푸짐하고 건강하게 찜을 해 먹는다.


근본적으로 냉장고를 채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 먹을 재료를 오늘 오전에 장을 봐다가 신선하게 오늘의 반찬만 해서 먹는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밑반찬이라 불리는 콩자반이나 콩나물 무침 어묵조림 같은 것들도 거의 이틀이나 사흘이면 다 소비될 정도만 만든다.


냉장고뿐 아니라 생활전반에서 나는 극강의 미니멀리스트는 아니더라도 중도 미니멀리스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양가 어른들은 우리가 늘 굶을 것을 걱정하여서 인지 자식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는 건지 그득그득 음식을 나누어주신다. 친정엄마께는 많다 적다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과할 때는 도저히 이건 많아서 못 먹는다며 덜어내고 친정오빠네와 나누거나 친구에게 나눠주기도 하지만 시댁에서 주시는 양은 그 정도를 넘어서기도 하고 거절을 하기도 어렵고 용기를 내서 거절을 에둘러해도 "가져가서 먹다 버려라!"라고 말씀하시니 더 이상 진척이 없다.


사실 나는 그것이 싫다. 요즘에는 나누어 주시는 음식을 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들었지만 나는 그러지는 못한다. 이고 지고 가져와 소분하고 소분하고 소분하여 몇 달이고 챙겨 먹는다. 음식일거리가 줄고 얼마나 좋냐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아이들이나 아이들 아빠가 냉동했다 데워주는 것을 손대는 일이 적고 나는 잠깐 즉석에서 음식을 하는 노력이 소분하고 냉장고 관리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볍다. 심리적으로도 오늘 먹고 싶은 음식을 해서 먹는 편이 냉장고에 뭐 있는데, 그거 먹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의 무거움 보다 좋다. 맛있을 때 받아와서 나누어주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는데 집집마다 살림하는 스타일이 모두 다른데 나조차 부담을 느끼는 것을 무작정 맛있는 거라며 주변에 나누어주기도 조심스럽다.


반찬거리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생선은 박스채, 콩은 자루째, 쌀은 어쩔 때는 한 가마니가 들어온다.

쌀을 기준으로 보자면 나는 한살림에서 쌀을 보통 8킬로 더위가 조금이라도 오려고 하면 4킬로 정도만 구입해서 먹는다. 그래서인지 그런 대량의 식재료가 거실 한 복판에 딱 들어오는 날은 숨도 차고 기도 차는데 끙끙 싸매고 생선을 다듬고 콩을 까서 냉동실에 착착 얼린다.


오전 열 시경 아이들을 보내고 커피를 마시다 문뜩 내 냉장고 안이 텅텅 빈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가 궁금해졌다. 결혼 10년이 넘도록 냉장고는 늘 내 의지대로만 물품이 차지 못했고 내 집에서 가장 나의 통제를 많이 받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 집 곳간은 어머니 소유인 것 같이 느껴졌다.


비우자!


마음을 먹으니 언제 까서 삶아까지 두고 얼려둔지 몰라 성에가 낀 호랑이콩이 조금 나왔고 아무도 먹으려 하지 않는 생선이나 떡류가 나왔다. 보통 이런 것들이 나 혼자 있는 시간의 점심식사였는데 그러다 보니 내가 정말 뭘 먹고 싶은지 이 음식이 나에게 필요한지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지가 꽤 된 것 같았다. 비우기 시작하니 그저 의무감에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음식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눈을 질끈 감고 한 번 싹싹 비워내 보았다. 당장 사용할 양념류와 신선한 야채들을 제외하고 거의 다 비웠다.


꽉 채워놓는 편이 아니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냉장고를 비웠을 뿐인데 의무와 상명하복 얽매여 있던 책임감까지 함께 벗어난 기분이었다.

더해서 어른들은 알 수 없는 소극적 복수를 한 것 같은 기분까지 들어서 왠지 모르게 통쾌했다.



그리고 내일은 신선한 바질과 토마토를 사다가 냉 파스타를 해 먹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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