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달한 당근의 맛 알싸한 생강의 온기
장염인 줄 몰랐다.
메슥거리는 기분이 몰려왔지만 평생 장염 같은 걸 겪어본 일이 거의 없는 데다가
탈수증상보다는 자꾸만 잠이 와서 내 몸이 왜 그럴까 그냥 요즘 좀 기운이 없나 보다 생각했다.
며칠 계속해서 어지럽고 잠이 오고 몸이 멈춰있는 기분이라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날이 지속되니 그제야 나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인지했다.
둔한 사람 같으니......
병원으로 향해 위장약을 한가득 받아 들고 이걸 먹고도 해결되지 않으면 상급병원을 가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의 상태가 심각함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속이 윙윙거리는 것 같은 메슥거림이 한 번에 더 치고 올라왔다.
왕창 게워내고 나니 3일 전에 먹었던 연어조각이 그대로 올라온다.
아빠는 회를 먹고 싶다고 하고 아이들은 초밥을 먹고 싶다고 해서 싱싱한 횟감을 골라와 연어초밥 광어초밥을 만들고 회도 먹었는데 사실 나는 그날 날 것의 무언가를 먹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요리를 하는 사람은 요리를 먹을 사람만 생각하게 되어있는지라 나의 기분은 그저 스쳐 지나가 버렸다.
결국 다들 멀쩡한데 내 기분 탓이었는지 나만 탈이난 것이다.
저 조각하나 가 소화되지 않고 내 몸속 여기저기에 독소를 뿜어내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조금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저 작은 것이 나에게 마구 독을 뿜어냈구나.....
그리고는 진정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날아갈 것 같은 컨디션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겠노라 다짐에 다짐에 다짐을 했다.
아팠던 내 몸에 비워낸 내 속에 무엇을 첫끼로 줄까 고민하다가
유튜브를 틀어 '하루하루 문숙'채널을 열었다.
아이아빠가 수술을 하고 회복을 해갈 때에 종종 참고했던 채널이었는데 나를 위해 이 채널을 다시 한번 열었다.
패드를 손가락으로 휙휙 튕겨 올리며 '당근생강수프'에 시선이 갔다.
내 몸이 따뜻하게 데워질 것 같은 온기가 보기만 해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스프라고 하면 늘 루가 있어야 하고 크림이나 우유 같은 동물성 물질이 추가되야 할 것 같았었다. 언젠가부터 맑게 끓은 토마토 수프를 우리 집 메뉴에 추가하면서 그 고정관념이 한 번 날아갔었는데 이번에 당근수프를 끓이면서는 루나 크림 우유가 없이도 크리미 한 수프를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잘 볶아진 양파와 당근에서 달큰한 맛을 내고 생강즙과 가루 울금가루 등으로 톡 쏘는 맛을 더하고 소금으로 넉넉히 간을 해서 단짠의 조화를 맞추니 세상 오묘하고 복합적인 맛인데 정말 한 입 먹자마자 '이건 보약이구나'싶다.
가족들을 위해 취향을 고려한 음식을 만들고 잘 먹이는 일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지만 정작 나를 위한 한 끼는 가족들에게 외면당한 음식이거나 라면과 같이 조리과정을 최소화 한 음식을 먹기 십상이었다. 이번에 진하게 앓고 일어나면서 내가 나를 빨리 회복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끓은 당근수프는 단순히 음식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나에게 하는 다짐 같은 음식이었다. 나를 위해 요리를 해 보겠노라. 나 스스로를 조금 더 아껴주고 나를 위해 요리하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겠노라. 그리고 조금 더 즐거운 마음으로 나를 다독이겠노라 하는 것이었다.
한 그릇의 음식이 주는 위안이라는 게 이런 걸까?
나는 주방에 서는 마음이 새삼 달라졌고 앞으로 나에게 당근생강수프는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