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찾아 끈기있게 시도해 본다면?
이번 역시 단단한 벽돌책 읽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이다. 모비딕은 '백경'으로 번역되어 있기도 하고, 흰 고래를 뜻한다. 앞서 소개된 고전과 같이 모비딕도 'ASK생각학교'에서 함께 토론하면서 읽은 책이다. 빅토로 위고가 프랑스에 관해 자신의 영혼까지 탈탈 갈아넣어 '레 미제라블'을 쓴 것처럼, 허먼 멜빌은 고래잡이 시절의 경험 그 이상으로 '고래학'의 백과사전이라 불릴만큼 고래에 관한 모든 지식과 고래잡이, 포경선에 관한 역사부터 설명까지, 또 그 속에 얽혀있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치밀하게 기록했다.
모비딕처럼 두께에 압도당하는 벽돌책은 쉽게 읽을 수 없는 책이다. 700페이지가 넘는 책 두께부터 기가 죽는다.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갈등구조와 클라이막스가 뚜렷하게 보이는 전개는 찾기 어렵다. 오로지 책을 읽어내기 위한 진득한 인내만 있으면 된다. 완독도 어려운 일이니, 읽는 양을 나누어 '함께' 읽기를 추천한다. 고전명작 반열에 오른 책이니 만큼 장기간을 계획해서 책 속 명문장을 발견하고 허먼 멜빌과 대화나누듯 깊이 토론해 본다면 누구든지 '모비딕'의 매력에 빠질 수 있으리라 본다.
망망대해, 드넓은 푸른 바다에 유유히 몸을 움직이며 한 번씩 분수포를 쏘는 녀석이 있다. '녀석'이라고 말하기엔 훨씬 거대한 향유고래는 온 몸이 백색으로 되어 있으며 경이로움과 두려움, 공포 그 자체다. 거대한 신적 존재에 버금가는 모비딕을 반드시 죽이겠다고 복수심으로 활활 타오르는 존재가 있으니, 그는 포경선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해브다. 에이해브는 모비딕을 잡으려다 자신의 다리 한 쪽을 잃었다. 잃은 한 쪽 다리는 고래뼈를 갈아 의족처럼 만들었다. 에이해브는 자신의 다리 한 쪽을 내어준 모비딕을 반드시 자기 손으로 죽이고자 피쿼드호를 타고 먼 항해를 시작한다. 피쿼드 호 안에는 각자 역할이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는 여러 인물들이 함께 등장한다. 선장 에이해브, 항해사 스타벅, 스터브, 플래스크, 글 속 화자인 이슈메일과 단짝(?) 퀴퀘그 등 주요 인물들과 수많은 조연, 엑스트라까지 만날 수 있다. 모비딕을 잡기 위해 출항하는 피쿼드호는 출항전 부터 불길한 징조를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유유히 포경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드넓은 바다를 향해 항해한다.
고래학 백과사전이라고 불린 만큼 고래에 관한 모든 지식 중 신비로운 것은 '용연향'이었다. 향유 고래는 몸집의 1/3이 머리가 차지한다고 한다. 큰 머리 속에는 기름이 가득한데, 이 고래 기름이 고래 잡이들에게 '돈'이 되는 거라 기름을 잘 뽑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고래 기름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 ‘바다의 로또’라 불리는 고래똥=용연향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똥인데 향기가? 필요없이 버려져야 할 것이 최고급 향수로 쓰인다고 한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똥으로 보일테고, 용연향을 아는 사람에게는 ‘로또’로 보일 것이다.
‘내가 그 동안 놓친 똥 아니 용연향도 꽤 많지 않았을까?‘
‘어떠한 공동체일지라도 용연향을 알아보는 내 눈이 준비되어 있다면 언제든 ‘로또’가 되는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시커먼 바다 위를 달리며 복수심에 불탄 에이해브가 선장으로 있는 피쿼드호로 가보자. 그토록 찾던 모비딕을 만났지만 피쿼드호에 승선한 모든 이들은 바닷물 속에 영원히 매장되고 만다.(단 한 사람만 빼고) 죽음을 상징하는 관, 퀴퀘그의 관은 구명부표로 쓰였다. 마지막에 구명부표인 퀴퀘그의 관 덕분에 단 한 사람이 생존하게 된다. 죽음과 삶이 마치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딕을 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고래잡이들은 그저 작은 생물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밧줄과 작살로 무차별 공격에 맞선 모비딕은 거대한 신적 존재에 버금같다. 모비딕은 그저 다리 한 쪽을 내준 에이해브의 복수의 대상이었을까? 마지막에, 더 이상을 작살을 던지기 않고 공격을 멈추는 그 순간, 모비딕도 사람들을 헤치지 않았다.
과연 모비딕은 뭘까?
생각해 보면 내 속에도 모비딕이 있다. 거대하고, 내 의지대로 할 수 없고, 때론 복수심과 질투심이, 때론 두려움이 떠오르는 그것. 2년차 교사일 때, 시골 작은 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3월에 우리 반 아이들이 6명이었는데, 중간에 쌍둥이가 전학 가 버리는 바람에 4명이었다. 4명이라서 선생님이 더 잘 가르칠 수 있어서 좋았겠단 생각은 안하길 바란다. 어떤 활동을 하려고 해도 무기력한 아이들, 체육도 못하고 아이들 스스로 공부도 못한다고 어릴 때부터 한계를 정해 버리는 아이들. 그 아이들과 함께 좀 더 활기차게 잘 해 보고 싶었던 생각은 잠시, 나 역시 무기력 속으로 숨어 들어간 기억이 있다. 교사로 살아오면서 아이들과 소통이 어려울 때도 있었고, 더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만 할 때도 있었다. 잘 해 보고 싶은데도 스스로 벽을 긋고 숨어버렸던 ‘나’도 존재한다. 이젠 조금 더 강해지고 싶다. 에이해브 선장은 병적으로 모비딕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하지만, 그 끈기와 끊임없이 모비딕을 이겨보려는 ‘깡’ 하나만큼은 배우고 싶다.
허먼 멜빌(모비딕의 저자)은 고래도 열심히 해체해가며 설명하지만 때로는 아름다운 문장을 남겨서 내 마음에 ‘모비딕’이 새겨지도록 했다.
맑은 하늘에는 무지개가 찾아오지 않는다.
무지개는 증기만 빛나게 할 뿐이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희미한 의심의 짙은 안개를 뚫고
신성한 직관이 이따금 분출하여,
내 마음속의 그 짙은 안개를 천상의 찬란한 빛으로 태워버릴 때가 있다.
지상의 온갖 것에 대한 의심,
천상의 무언가에 대한 직관,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은 신자도 불신자도 되지 않고,
양쪽을 공평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고래를 보며, 무지개와 마음 속 안개, 그리고 공평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으로 사유하는 것에 무릎을 쳤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문장을 보며, 자연을 떠올리고,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할지 사유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읽는 게 아닌가 싶다.또 다른 문학책을 잡아 읽고, 쓰고, 사유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오롯이 이 에너지가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