펨벌리 대정원이 좋은 세 가지 이유
사랑스러운 엘리자베스와 듬직한 다아시 덕분에 내 인생에 언제 있었나 싶었을 연애세포가 팡팡 터지기 시작했다.
제인 오스틴이란 사랑스런 작가님을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이 책이 제목 자체로만 봐도 생각할 거리가 많다고 여겨진다.
오만과 편견!
살아가면서 수많은 오해들이 쌓여 우리는 관계를 잃게 되는 수가 많다.
나 역시 짧은 인생(?)을 되돌아볼 때 잃거나 깨어진 친구관계, 동료관계가 더러 있었다.
서로 간의 오해도 있을 것이고 오해가 쌓여 관계의 단절로 연결되었을 터다.
오해에서 이해로 가지 못하는 걸림돌이 있다면 서로가 가진 오만함과 편견이다.
이 묘한 감정을 사랑을 매개로 해서 인간이 가진 오만함과 편견,
오만한 남자의 시선과 편견을 가진 여자의 시선으로 풀어낸 책이 '오만과 편견'이다.
200년이란 시간의 힘을 거슬러 오면서도 전혀 예스럽지 않은 이 세련된 느낌은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감정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을 바뀌어도 관계 속에서 오는 수많은 감정들은 변치 않기에.
오만은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뿌리를 두고,
허영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지. (34쪽)
다아시는 엘리자베스를 보고 첫 만남부터 한눈에 반했을까?
엘리자베스는 그토록 다아시의 진심을 몰랐을까?
만약 그들이 서로의 감정을 조금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했을까?
소설 속 엘리자베스는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줄 아는 캐릭터로 당시로선 파격적이고 많은 여성들에게 워너 비였을지 모른다.
첫 만남부터 엘리자베스는 다아시를 오만한 남자로 정해버렸다.
하지만, 오만함 이면에 숨겨졌던 다이시의 품성과 사랑을 깨닫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틀을 깨기 위해 아픈 과정을 거쳤을까?
3부 첫 부분 펨벌리 대정원 묘사가 나온다.
다아시의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되는 편지와 함께 펨벌리를 보는 엘리자베스는 다아시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조금 더 알게 된다.
그의 실체와 함께(펨벌리 대정원의 소유주는 다아시!, 알고 보니 건물주?)
이 소설이 200년 전에 쓰인 애틋한 연애소설인 줄 알았는데, 작가가 텍스트 안에 숨겨둔 장치가 많았다.
이 장치를 탐구하는 과정이 토론이다.
혼자 읽었더라면 그저 ‘다아시 너무 멋져!, 엘리자베스처럼 살고 싶어!‘ 하며 끝냈을지 모른다.
생각학교 토론을 통해서 대정원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
인공적이지 않으나 자연과 잘 어울려지는 대정원이 주는 균형감은 성숙하고 배려깊은 사람이 연상된다.
펨벌리 대정원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운 경치를 보였다.
당시에 균형있는 정원의 모습은 도덕성을 판단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원과 도덕성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냐 싶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사람 역시 스스로 타고난 기질(=자연)과 자라면서 받게 되는 교육과 만남들(=인공)의 조화로 성장한다.
자연과 인공의 적절한 균형이 도덕성을 갖춘 대정원의 모습처럼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또한 스스로 가진 오만과 편견에서 사랑과 균형을 가진 사람들로 변화하고 성장한다.
이들의 변화에서 꼭 필요한 과정이 스스로 가진 감정을 알고 표현하기다.
감정의 이름을 아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어떤 감정인지 감정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얼마전, 티비에서 본 한 아나운서의 고백이 떠오른다.
나도 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한 그녀의 고백이 그저 남의 문제가 아니였다.
어쩌면, 나도 내 감정을 잘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지 않았을까?
학교에서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숱한 문제들 역시 서툴고 미숙한 감정표현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연습을 부단히 시킨다.
감사함, 고마움, 미안함, 속상함 등 내 안에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그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치유가 일어난다.
뭔지 모를 감정 때문에 답답해서 더 힘들 때가 있다.
펨벌리 대정원을 가꾸는 가드너가 분명히 있었을 거다.
사람 간의 관계 역시 회복하는 과정으로 가기 위해 스스로 변화되기도 하지만 마중물을 부어주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오만과 편견'에서도 엘리자베스의 이모와 이모부인 가드너 부부가 나온다.
이 부부의 도움으로 둘(엘리자베스, 다아시)은 사랑을 깨닫고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문단에 가드너 부부에게 감사를 전하는 표현이 세 번이나 나온다.
마지막 부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읽었는데 토론을 통해 깨닫게 된 부분이다.
감사를 세 번이나 할 만큼 감사했던 이모부의 이름이 하필 가드너!
이 묘한 이중의미를 찾도록 한 것도 제인 오스틴의 큰 그림이었을까?(^^)
정원을 가꾸는 가드너, 다른 사람들의 삶에 조금 더 도움이 되는 가드너,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나의 내면을 잘 가꾸는 셀프 가드너의 삶까지.
연애소설인줄만 알았는데, 한사상속과 신분제 등 당시 사회제도 모순도 살펴보고, 달라도 너무 다른 다섯 자매 모습에서 보여지는 여성상 등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오만과 편견‘을 읽게 되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