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로 쏘다!

타인의 고통-수잔손탁

by 휴레스트

0. 사진 이전에, 고통에 대하여


괴롭힌다는 것은 당하는 자에게는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말은 왕따나 학교 폭력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인류가 생긴 이래로 절대 없어지지 않는 구조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조다. 음식을 취득하는 자그마한 일에서부터 전쟁에 이르기까지.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고통을 받게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고통을 주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다는 거다. 피해를 입었지만 피해당하였는지 모르고, 고통을 주지만 고통을 준지 모르는 구조. 어느새 우리는 이런 구조하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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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과 그림의 차이


사진이 발명되면서 우리는 이미지라는 것을 훨씬 친숙하게 받아들인다. 렌즈를 갖다 대고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끝. 1초도 채 되지 않는 시간만으로 우리는 순간을 소유할 수 있다. 빛, 사람, 표정 등 우리는 순간 스쳐가는 모든 것을 영원이란 형식으로 변형시킨다. 그게 사진이다. 예전 같았다면 하나하나 그림으로 그렸을 장면들이다. 순간을 저장하는 방법이 그림에서 사진으로 바뀌면서 가장 큰 변화는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태도다.


그림은 화가가 오랫동안 대상을 바라보면서 조금씩 캔버스에 본뜬다. 그렇기에 순간이 왜곡될 수 있고, 오랜 시간 화가의 손을 타기에, 그의 의도가 당연히 담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진은 다르다. 빛을 이용해 순식간에 현재를 담아낸다. 노출되는 시간은 짧고, 사진사의 손을 타는 시간이 짧다. 사람들은 사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사진을 대하는 우리들이 가진 사각이다.



2. 사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원초적 가해성


현재에 이르러 사진도 충분히 의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사진사라는 명칭도 어느새 사진작가라 불린다. 작가라는 명칭이 가장 빈번히 쓰이는 경우는 글이다. 글을 쓰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 말한다. 작가는 글이라는 도구로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공유한다. 동일한 구조로 사진작가는 사진이라는 도구로 자신의 생각을 공유한다. 이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피사체. 글과 사진의 가장 큰 차이는 피사체의 유무다.


피사체는 단어에서부터 당하는 입장이라는 것이 명시된다. 글은 대상이 없이 쓸 수도 있고, 허구의 존재를 꾸며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진은 빛을 이용한 본래의 속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피사체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 피사체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수잔손탁의 '타인의 고통'은 이 사진이 가지는 필연적 요소 피사체에 대해 이야기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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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진과 전쟁의 끊을 수 없는 고리


영어 동사 숏(shot)은 '사진을 찍다'와 '총을 쏘다'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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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구는 사진이 가진 잔혹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표현이 아닐까 한다. 손탁의 글을 보면 사진이 가진 잔혹성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전쟁이다. 전쟁은 인류 역사상 많은 변화를 일으켜 온 이벤트 중에 하나다. 때로는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기술들도 전쟁 때문에 생긴 거나 마찬가지다.


사진 또한 전쟁에 이용되어온 도구 중 하나다. 초창기 사진은 수많은 전쟁 사진을 찍었다. 전쟁이 가진 잔혹성이 사진을 통해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이때, 사진의 역할은 분노 조장이다. 적군에 의해 파괴되고 상처 입은 모습을 보여줘 국내에서의 우호적 여론을 형성하는 거다. 왜냐하면 사진은 철저하게 현재의 장면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은 결국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는 거다. 그래서 사진은 전쟁에 승리한 모습 등을 비장함과 숭고함으로 담아 내, 사람들이 전쟁에서 오는 거부감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4. 전쟁 사진을 통해 보는 상대적 타자성, 그로 인한 약탈성


전쟁 사진에 사용되어온 피사체는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뀐다. 처음에는 피사체를 작가가 임의로 꾸미기도 했다. 자신들의 연출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초창기의 전쟁 사진들은 많은 연출이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을 전후로 이런 조작은 거의 사라져 간다. 그리고 사진의 피사체 역시 점차 서양인에서 동양인으로 바뀐다.


손탁이 특히 지적하는 부분은 바로 피사체가 되어 고통받는 인물이 동양인에서 서양인으로 바뀌면서 사진을 보는(혹은 소비하는) 사람들의 스탠스가 바뀐다는 점이다. 그들은 전쟁의 사진을 보면서 잔혹성을 느끼지만 더불어 안전감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사진 속 고통을 받고 있는 인물은 자신과 같은 서양인이 아니라 거의 본 적이 없는 동양인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보다 끔찍한 장면들까지도 사진에 고스란히 담기게 만드는 역할까지 덤으로 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전쟁 사진을 볼 때, 사진작가에 대해서는 주목을 하고 이름을 남기지만, 그 피사체에 대해서는 한 낯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사진이라는 갑에 의해 저격당한 을일 뿐이다. 물론 전쟁의 상황을 알리는 저널리즘에 대해 따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작가들이 있기에 우리는 제 3세계에서의 고통받는 사람을 이해하고 돕는다. 여기서는 그런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 사진이 가진 잔혹성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진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피사체에 대한 약탈.



5. 사진이 보여주는 고통의 단절(=고통의 소비)


초창기에는 서양인들의 잔인한 모습이 잡지 등에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전쟁에 대한 전쟁’이라는 작은 프로젝트에 불과했다. 전쟁 참전 용사들이 전쟁 중에 입은 상처들(입이 찢어지고, 눈이 파이는 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사람들은 이 사진을 보면서 전쟁의 아픔을 직접 느끼며 많은 전쟁 반대 여론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아니다.


이라크 전쟁만 봐도 그렇다. 매일 우리는 전쟁의 소식을 듣고 있지만 정작 화면에 보이는 것은 미사일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전쟁 무기와 거기에 대한 폭발 장면뿐이다. 우리는 이 장면만으로는 전쟁의 고통을 확실히 전달받지 못한다. ‘타이의 고통’을 보면 한 예시가 나온다. 시리아에 살고 있는 한 여성은 내전이 발생하기 바로 직전까지도 뉴스에서 듣는 전쟁 소식이 자기와 상관없는 먼 지역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앞에 있었다.


왜 이런 상대적 거리감 조성되었을까? 그것이 바로 사진이 가지는 효과가 아닐까 한다. 사진은 처음에는 엄청 강력한 이펙트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는 곧 사람들의 눈에 익숙해지기도 쉽다. 캐나다의 예시를 들어 설명하자면, 흡연율을 줄이기 위해 캐나다는 담뱃갑에 흡연 피해자들의 사진을 게재했다.(지금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흡연율 감소가 뚜렷하게 보였지만, 점차 사람들은 사진을 가리거나 사진을 봐도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시 흡연율은 원래의 수준으로 회복했다.


손탁은 이처럼 사진이 가진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사진의 소비성이 아니었을까 한다. 우리는 모두들 내제적 잔혹성을 가지고 있다. 잔혹한 장면(사진, 그림 등)을 꺼려하면서도 그것을 보기 위해 우리는 노력한다. 예를 들어 예전 김선일 씨의 살인 장면이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다. IS가 동영상을 유포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경로로 그 동영상을 찾아서 봤다. 그리고 다들 경악을 했다. 그 외 전쟁 사진이나 고통받는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눈이 자꾸 끌리는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사진은 이렇듯 고통을 소비하는데 최적의 도구인 셈이다.



전체적인 총평


수잔손탁의 ‘타인의 고통’은 가만히 읽다 보면, 과연 그녀가 하고픈 말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든다. 그녀는 단지 에세이의 방식으로 사진이 가진 속성을 담담히 풀어내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진이라는 도구를 속속들이 파헤치는 게 맞을 거다. 그 속에 가진 의미들을 하나하나 독자의 가슴에 세기듯이. 나는 그녀가 이 에세이를 쓴 이유는 이런 생각거리를 던지기 위해서가 아닐까 한다. 우리가 그냥 보는 사진이 가질 수 있는 잔혹성과 우리가 의연 중 잊고 있던 피사체와 사진과의 갑과 을의 관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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