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 위화
지금 막 이 책을 읽은 사람으로서 무슨 말로 글을 시작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처음에는 무슨 몹쓸 놈의 자기 항변처럼 들렸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먹먹하면서도 처절한 인생 이야기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칸 영화제 수상작의 원작 소설이구나.', '영화가 상을 받은 만큼 스토리가 엉망은 아니겠지.'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유칭이 죽을 때까지 피를 가져가는 병원의 의사를 보면서 욕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면 이제 갓 12살 정도 된 아이였을 텐데, 얼마만큼의 피를 가져갔길래 죽었을까. 또 삶은 콩을 먹다 죽은 쿠잔을 보면서 '이 아이는 무슨 잘못으로 이렇게 죽어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야기의 주인공은 화자인 푸구이가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현명한 부인이었던 자전이라든지 그녀를 닮아 현명하지만 어린 시절 질병으로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게 된 펑샤까지. 어쩜 이렇게 쉬씨 집안의 아픔은 내 마음을 후벼파는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그들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서 더 안타까웠는 것 같다. 푸구이의 가족들은 현장도, 국민당도 해방군도 아니었다. 단지 매년 푸구이의 신발을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행복해했을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돌아온 푸구이에게 자전이 했던 말) 그들을 힘들게 했던 건, 따지고 보면 푸구이의 노름도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도, 그리고 문화 대혁명도 아니었다. 다면 그들의 인생 자체가 그렇게 사람들을 고달프게 하지 않았을까? 책을 덮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은 푸구이가 돌아와 자전과 펑샤 그리고 유칭이 모여 앉아 밥을 먹으며 웃고 떠드는 모습이다.
언제 한 번 어머니에게 언제가 가장 행복하게 떠오르냐고 물어봤던 적이 있다. 그러자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일 때, 어머니의 무릎이 아프지 않고 바로 집 뒤 공장에 일하러 갈 때쯤이라고 말했다. 당시에도 어렵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일을 하면 푼돈이라도 모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그때는 한 달에 한 번 식구들끼리 모여 앉아 통닭을 시켜 먹곤 했다. 어린 나로서는 당시 부모님은 지금보다 더 많이 싸웠고, 누나는 수시로 대들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때가 엄마는 더 그리웠던 모양이다. 비슷하게 누나한테도 예전의 일을 물어봤던 적이 있다. 누나 역시 당시를 회상하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이 누나를 엄청 아껴주었다고 이야기했다.
추억 보정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 순간이 추억이 되면 아름답게 포장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정말 그때를 치열하게 살아왔다. 내가 기억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어떤 때보다 가족끼리의 다툼이 심했던 때였는데, 당사자들은 아니었나 보다. 그러면서 푸구이가 하는 말이 떠올랐다.
내 한평생을 돌이켜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아버지는 내가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신거야.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내 주변 사람들을 보게나. 룽얼과 충성, 그들은 한바탕 위세를 떨치기는 했지만 제 명에 못 죽었지 않은가,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거야.
p.278 (푸른숲,2007)
분명 푸구이의 삶은 평범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평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평범함이란 그저 지나고 나니 '평범한' 것이다. 내 초등학교 3학년 때를 떠올린 가족들 역시 그들에게 '평범'했을 거다. 그렇게 우리는 지나고 나면 결국 평범해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결국 인생이 평범해지기 위해서는 우선은 지나고 나봐야 한다는 거다.
책을 읽다 보면 처음 나오는 화자, 민요를 수집하는 직업을 가진 '하품하는 남자' 역시 또 다른 푸구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쩜 그는 젊었을 때 푸구이의 느낌이 간혹 난다. (버릇없고 안하무인인 것을 제외하면) 한량 같은 느낌의 화자는 정말 푸구이가 노름을 하지 않고, 그대로 자랐다면 저렇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화자는 사실 이 남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다 이 남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위화는 왜 처음부터 푸구이의 과거 회상이 아니라 이 남자를 등장시킨 걸까? 큰 역할이 없어 보이는 이 남자의 등장은 전체적인 이 소설의 분위기를 바꿔놓는데 큰 역할을 하는 듯하다. 단순히 푸구이의 독백으로 이 소설이 진행되었다면 그의 인생 이야기는 엄청 무겁고 어두웠을 듯하다. 우리는 흔히 남에게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조금씩은 편집을 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느낀 감정을 그 상대방이 그대로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화자와 푸구이는 젊은 민요 수집가와 인생 끄트머리에 있는 노인이다. 노인이 자기의 과거 이야기를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에게 더욱 무겁게 이야기할 것인가? 아니. 전혀 그 반대다. 우리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이해관계가 없는 남에게 들려줄 때는 별것 아닌 듯이 이야기한다. '하품하는 남자'의 존재는 푸구이의 이야기를 조금 더 희화해 들려줄 수 있는 장치이다. 간혹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을 욕하는 것도 이 화자가 있기에 전혀 어색함이 없다.
만일 이 화자가 없었다면, 아마 끝까지 이 책을 읽지 못하고 중간에 덮은 사람들도 몇몇 되지 않았을까?
푸구이의 젊은 시절을 듣다 보면 정말 때려죽여도 시원찮은 녀석이 푸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노름에 안하무인적인 성격, 거기에 손찌검까지. 정말 욕먹기 딱 좋은 요소들만 모아 놓은 캐릭터가 푸구이다. 그렇기에 처음 그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아침드라마를 보면 나오는 클리세이며, 정당한 이치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푸구이의 돈을 따간 룽얼 역시 언제 망하나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다혈질적이고, 충동에 약한 푸구이를 볼 때면, 자전이 얼마나 착한 아내인지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푸구이의 불행은 곧 자전의 불행과 이어진다. 그런 점을 볼 때, 과연 푸구이의 벌이 맞는가? 그리고 그 벌 또한 온당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벌이고 보상이고 하는 건 애초에 없다.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그들 역시 그 시간의 한 축을 묵묵히 견뎌온 것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무수한 죽음을 보게 된다. 정치체계의 변화로 인한 죽음, 위계 때문에 하찮게 버려지게 되는 죽음.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인한 죽음. 모든 죽음은 불시에 찾아오고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이는 결국 남아있는 이들이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힘들어 이게 벌인가 하고 싶은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죽음은 벌도 아니고 시련도 아니다. 단순히 정말 재수가 없어 이런 시기에 태어난 탓일 뿐이다. 푸구이의 마지막을 살펴보면 어느새 그것을 인정한 푸구이의 자세가 보인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치러주고, 내 손으로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p.278 (푸른숲, 2007)
그는 이제 와 차라리 다행이라 말한다. 죽는 날이 와도 어떻게 살아나가나 하고 걱정할 이가 없다는 것을. 이미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도리라는 것을 느낀 거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추천하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읽어보라고 말할 듯하다. 한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앞으로 나에게 닥쳐올 일이기도 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신이란 없고 그저 묵묵히 견뎌나가는 한 인간만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거라는 것은 말하지 않은 채.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 정말 평범한 삶이라는 게 도대체 뭔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책을 읽기 직전의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