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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프포스트코리아 Aug 10. 2018

36년 전 브라질로 떠난 할아버지가 청년들에게 하는 말

[허프인터뷰] 손자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이찬재 할아버지의 이야기

당신도 혹시 ‘탈조선’을 꿈꾸는가? 


수년 전부터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헬조선’, ‘탈조선’ 등 이민 관련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지난 3월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1539 청년 2700여명을 상대로 실시한 ‘2017 청년 사회 경제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년 10명 중 3명은 해외 이주를 고려했다. 이들은 “행복한 삶을 위해” ‘탈조선’을 꿈꾸었다.


손주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해진 이찬재 할아버지 역시 30여 년 전 ‘탈조선’을 한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의 ‘탈조선’이 뜻하는 것처럼 한국이 싫어 이민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36년간 브라질에서 살다 지난해 귀국했고, 지금도 종종 브라질에서의 이민 생활을 그림 주제로 다루곤 한다. 30여 년 전 브라질로 향한 그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한국을 떠났을까? 36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허프포스트코리아는 최근 이찬재 할아버지와 만나 이민 생활의 장단점과 그가 현재 이민을 꿈꾸는 이들에게 보내는 조언을 들어봤다. 이찬재 할아버지에게 브라질에서의 이민 생활은 “천국”과 같았다.


그림


손주들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셨어요. 그림은 어떻게 그리기 시작했나요?

=딸과 손자들이 브라질을 떠나고 나서 아들에게 제안을 받아 시작했어요. 그 당시 저는 손주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아이들이 한국으로 떠나고 나서는 할 일 없이 빈둥거렸죠. 그러다 막내 손자가 태어났을 때, 이 아이가 크면 어떤 사람이 될까 궁금해졌어요. 아이가 성인이 될 즈음에는 내가 이 세상에 없을 것 같다고 하니 아들이 충격을 받았나 봐요. 그래서 손자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더라고요.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걱정했지만,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어요.

그림으로 하루의 일과를 기록한다는 건 할아버지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텔레비전이나 보고 이웃과 이야기할 거리가 있나 괜히 기웃거렸겠죠. 나이 먹고 할 일이 있다는 자체가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의 주제를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요?  

=아들은 항상 아무거나 그리라고 하더라고요. 그림을 막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그런 것 같아요. 막내 손주는 만 세 살인데 공룡을 좋아하고 큰애들은 지금 중학교 1학년, 2학년인데 아이돌을 좋아해요. 그래서 막내를 위해서는 공룡, 첫째와 둘째를 위해서는 방탄소년단을 그리죠.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제 인생을 회상하는 그림을 그리는데, 손주들이 할아버지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는지 배울 기회라고 생각해요. 다만 고생한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좋은 이야기만 전해주고 싶어요.


이민 초기

1981년 이민을 떠나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고등학교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쳤어요.


이민은 어떻게 떠나게 되었나요?

=어떤 면에서는 우연이었죠. 처가가 5년 먼저 브라질에 이민을 갔고, 장인어른이 우리를 데려가겠다고 한국으로 나오셔서 브라질로 떠나게 됐어요. 특별히 제가 결정한 사항은 아니었어요.


브라질로 떠나기 전 이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브라질로 오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한국에서 태어나 40년을 살았으니 다른 세상에서 살아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이민 준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이전에는 이민을 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어요. 별안간에 결정이 나는 바람에 언어를 배울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학원에도 가본 적 없이 떠났죠.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었어요.


이민 초기 브라질 현지 분위기는 어땠나요?

=브라질로 떠났던 1981년에는 한국의 경제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어요. 브라질에 도착해보니 브라질이 한국보다 훨씬 잘 살고 있었어요. 교포사회에서 브라질로 이민을 잘 왔다면서, 이곳은 천국이라고 하더라고요. 당시에는 집에서 바느질만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민 생활 시작하면서 고생이라는 걸 몰랐어요. 미리 정착해 있던 친척들의 덕을 크게 봤죠.


브라질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요?

= 언어 문제가 있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특기를 살리지 못해요. 그래서 현지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장사를 했어요. 그 당시 브라질에 사는 한인 교포들은 대부분 여성 의류를 팔았어요. 그래서 우리도 여성 의류 사업에 뛰어들었죠. 옷이라고는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었는데 말이죠. 당시 브라질의 의류 기술은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한국인들은 눈썰미나 손재주가 좋다 보니 높은 질의 옷을 만들었고, 그 덕에 브라질 고객이 많았죠.


이민 초반에는 어떻게 적응했나요?

=처음에는 연고가 없는 곳도 아니다 보니 막연하게 떠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이민 사회에서는 나중에 온 사람들이 이미 정착한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데, 언어가 필요할 때면 오래 산 사람을 붙잡고 도움을 청했어요. 그리고 교포 사회 속에 들어가니 포르투갈어를 몰라도 쉽게 살 수 있었어요. 장사를 할 때도 한국인이 만든 제품을 받아 한국인에게 주문을 넣고 판매하다 보니 언어로 인한 힘든 점은 비교적 적은 편이었죠.


자녀분들은 갑자기 떠난 이민에 쉽게 적응하던가요?

=당시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딸은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이었을 거예요. 아이들도 이민 생활에 적응하는 걸 너무나 힘들어 했어요. 미리 정착해 있던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먼저 입학 수속을 밟았어요. 아이들은 당시 포르투갈어를 거의 하지 못했거든요. 어린아이들이라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거예요. 그래도 잘 견뎌내고 학교를 마쳐 다행이죠.

남미 이민은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편인데, 당시 브라질에 한국인은 얼마나 있었나요?

=당시에도 브라질에 한국인이 많았어요. 확실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2~3만 명 정도 된 것으로 알아요. ‘한국촌’을 형성할 정도였으니 제법 컸죠. 당시에는 그곳에 진입하면 능히 살 수 있는 장사의 길이 있었어요.


할아버지에게 브라질은 어떤 곳인가요?

=브라질은 좋은 곳이죠. 날씨도 좋고, 브라질인들의 감정 표현도 순수해서 좋아요. 서양이지만 주식이 쌀이라 음식도 잘 맞았고요. 저는 유난히 브라질 음식을 좋아했어요. 


가장 좋아하는 브라질 음식은 뭔가요?

=페이조아다라는 음식을 가장 좋아해요. 돼지의 여러 부위와 팥을 함께 푹 삶은 요리인데, 브라질인은 물론이고 한국인들도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보통 맛이 아니죠.


귀국


이민 생활 중 한국에 나온 적은 없었나요?

=아내는 여러 번 나왔지만, 저는 36년 동안 한 번도 나오지 않았어요. 장사를 하다 보니 한 사람은 가게를 지켜야 하잖아요. 가끔 한국 생각이 나기는 했지만, 브라질에서의 삶이 참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심한 향수는 느끼지 않았어요. 아주 만족스러운 삶이었죠.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계기는 뭔가요?

=의류 사업이다 보니 나이가 들면 패션 감각을 습득하고 적응하는 게 힘들어요. 그래서 더 할 생각을 생각을 안하고 2005년쯤 은퇴했어요. 그 후에는 젊은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고, 손주가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학교에 데려다주는 게 제 일이었어요. 몇 년 뒤, 우리 곁에 살던 딸이 한국으로 떠났는데 우리 두 식구만 남아 있다 보니 한국으로 간 딸과 손자들이 계속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딸 근처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으로 오게 됐어요.


이민을 떠나기 전과 후의 서울은 어떻게 다른가요?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어요. 그런데 지금은 서울 어떤 곳에 가도 그곳이 어딘지를 모르겠어요. 광화문, 종각 이런 곳 외에는 전혀 모르겠어요.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아요.


수십 년만에 한국에 돌아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제가 태어난 곳이고 딸도 근처에 있어서 두려움은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있더라고요. 적응이 아주 힘들었어요. 발전된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어려워서 딸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했어요. 만약 딸이 살지 않는 다른 곳에 정착을 해야 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지하철을 타도 두렵지 않고, 갈아타는 것도 적응됐어요.

이민 생활의 장점이 있다면요?

=이민을 가게 되면 한국에서는 하지 못했던 일들을 쉽게 할 수 있어요. 한국에서는 교사로 일하다 보니 남에게 행상을 한다든지, 주문을 받는 일을 하는 게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그런데 브라질에서는 다 내려놓다 보니 뭐든 쉽게 할 수 있었어요.


단점은요?

=단점은 크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겠지만, 그것도 살다 보면 다 해결되니까요. 차츰차츰 배우다 보면 늘거든요. 더군다나 가보지도 못한 이국땅에 가는 데 어느 정도 힘이 들 거라는 건 이미 떠날 때부터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특별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웬만한 여건만 된다면 도전해보는 게 좋다는 생각이에요.


지금 이민을 꿈꾸는 젊은 세대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신가요?

=다른 환경에서 모험을 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같은 브라질이라도 지금과 그 당시의 브라질 상황은 다를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에는 가자마자 이민 생활에 적응해서 어려움 없이 잘 지냈는데, 지금 상황은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계획 없이 언어도 배우지 않고 떠났는데, 아마 요즘 젊은 분들은 어딜 가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정도의 계획은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아주 어렵지는 않을 것이고 성공할 기회가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죠.


또, 현지인들 사이에 빨리 흡수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거든요. 빠른 시간 내에 현지인 사회에 진입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림은 언제까지 그릴 계획인가요?

=언제까지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끝까지 그려볼 생각이에요. 나이 먹어서 더 이상 못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내가 진짜 할아버지 같다’는 댓글을 볼 때면 전 세계에 내 손주가 생긴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해요.


글: 김태우(허프포스트코리아 뉴스에디터)

사진 : 윤인경(허프포스트코리아 비디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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