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럽다’는 말은 늘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붙는다.
‘촌스럽다’는 말은 늘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붙는다.
지금 특정한 한 시대를 떠올릴 때 느끼는 묘한 설렘에는 아직 완전히 촌스럽지 않은 무엇이 남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촌스럽기 전에 이미 너무 반짝여버린 시절에 가깝다.
좋았던 시절의 이미지는 늘 조금 넘쳤다.
색은 유난히 쨍했고, 소리는 괜히 크게 울렸으며 표정은 이유 없이 밝았다. 지금 기준에서 보면 과장일 수 있지만, 그 숨길 수 없는 에너지와 억지로 줄이지 않아도 되는 넉넉함이 바로 그 시대의 체력이었다.
이 시절의 이미지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직 자기검열을 배우기 전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았고, 쿨해지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촌스럽다는 평가를 미리 의식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솔직함이었다.
표정은 대체로 크고, 감정은 쉽게 넘쳤다. 실패조차 드라마의 일부처럼 소비되었다.
그래서 이 장면들이 유독 오래 남는 건, 직접 살아서라기보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던 것들을 들여다보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당시는 막연한 낙관이 가능했던 마지막 시기였다. 열심히 살면 뭔가 될 것 같았고, 내일이 오늘보다 조금 나을 거라는 가정이 굳이 설명 없이도 통하던 때였다.
그 믿음은 일상의 표정으로 남았다.
도시의 간판은 지나치게 컸다. 광고는 이유 없이 진지했고, 음악은 ‘사랑’과 ‘미래’를 쉽게 입에 올렸다.
그때 만들어진 콘텐츠들은 이상할 정도로 크게 말한다. 사랑은 영원했고, 꿈은 반드시 이루어졌으며 청춘은 늘 뜨거웠다. 디테일은 부족해도 방향은 단순했다. 앞으로 가고 있다는 감각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 옛 뮤직비디오와 드라마, 광고를 다시 보며 묘한 감정에 빠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용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저렇게까지 믿을 수 있었던 태도가 부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태도를 현재형으로 가져오기 어렵다. 무엇이든 설명하고, 정당화하며, 계산한 뒤에야 선택하게 된다. 좋아하는 이유에는 근거가 필요하고, 믿음에도 논리가 따라붙는다.
감정은 점점 작아지고, 태도는 조심스러워진다. 자꾸만 이유 없이 환하게 웃고 있는 과거의 얼굴들을 들여다보게 된다.
웃음 뒤에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되던 시절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오늘날 그 시간은 안전한 과거로 소비된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시대, 망하지 않았다는 것이 보장된 시간이다. 그래서 마음 편하게 좋아할 수 있다. 책임도 없고, 실패도 없다. 오직 잘 편집된 기억과 선명한 이미지들만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있다.
사실 그리워하는 건 특정 연도의 패션이나 음악이 아니다. 그 문화가 가능하게 했던 세계관에 가깝다.
미래를 걱정하기 전에 일단 움직여도 되던 세계관, 모든 선택 앞에서 손익 계산표를 꺼내 들지 않아도 되던 속도였다.
그 시절은 늘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아무리 복각하고, 필터를 씌우고, 리메이크를 반복해도 그 감각은 완전히 살아나지 않는다.
음악을 다시 듣고, 패션을 흉내 내고, 화면비까지 재현해보지만 정작 그 시대를 지탱하던 낙관만큼은 복원하지 못한다.
결국 열광하게 되는 건, 한 번쯤은 세상이 나를 속이지 않을 거라 믿어도 됐던 태도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조금은 과하고 많이 솔직했던 흔적들이다.
그 시절은 끝났지만, 그때의 과잉은 아직 유효하다. 적어도 지금보다 더 크게 꿈꿔도 괜찮았다는 증거로서.